카미노

10월 24일

*고니* 2013. 3. 11. 13:50

10월 24일 일요일

폰페라다(Ponferrada) -> 페레헤 (Pereje) 29km

 알베르게 오픈 시간이 7시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6시, 조용히 나와 식당에서 짐정리를 하고 있으니 소화누님이 내려오신다. 용만이가 아침 준비를 한하고 했는데, 소화누님까지 따로 준비를 하셨다. 결국 용만이 핫도그와 소화누님의 샌드위치까지 오늘은 배터지게 먹겠다.

 

 아침부터 밥해서 죽 끓이고, 계란 고명 만들겠다고 했다가 뒤집게 없어서 스크램블 만들고, 핫도그용 소세지에 야채까지 볶고, 불잡고 하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관리인 아저씨 또 이상한 표정으로 관리 들어가신다. 어련히 알아서 치워줄까,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계속 뭐라 하시고, 아침부터 사람 짜쯩나게 해주신다. 떠날 때 가지고 있는 동전 털고 갈려고 어제 기부도 안했는데 기부할 마음이 싹 가신다.

 

 알베르게를 나와서 차도까지 나왔을때 용만이가 세탁물을 안챙겼다며 돌아간다.


“나 이제 아침 안해. 이제 삐뚤어 질테다.”


 아침 만드느라 정신이 분산되서 못 챙긴거라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러면 챙겨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단단히 뿔났다. 용만이와 알베르게에 돌아가 세탁물을 챙기고 돌아오니 다들 아까 헤어졌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용만이 걱정되서 우리가 어떻게 먼저 가냐”


 현정누나가 웃으며 반겨준다. 먼저 가라고 했거만, 다들 기다려준거에 용만이가 감동받았다.


“그럼, 아침 다시 하는 거야?”

“네. 헤헤”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헤벌죽, 급 방긋이다. 사람 감정이라 것이 참 사소한 것에 좌우된다.

 

“형, 여기 폰페라다 맞죠? 대학 스탬프 안 받았어요”


 폰페라다 외곽을 빠져나갈려는데, 용만이가 대학 크레덴시알을 살펴보더니 여기도 스탬프 받아야 하는 대학이 있다고 한다.


“여기가 폰페라다였나? 누나 여기 이름 기억나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걸을 당시에는 어느 도시를 지나는지 신경을 안쓰다보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사진보며, 글 정리하면서 저때 폰페라다였구나하고 지금 회상하지 저 때는 어디있는지 산티아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신경도 안썼다. 그저 걸을뿐.

 

 지영이는 이미 앞서 가버렸고, 뒤에 보아가 오고 있다. 보아는 알고 있을려나...


“보아야”


현정누나가 보아를 부르는데, 보아가 멀리서 길을 건너가 버린다.


“저런 센스 바가지하고는”


 외치는 소리 못듣고 다른 길로 갔다고 바가지라니 너무 박하잖아요. 다같이 길을 건너서 보아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보아야, 여기가 폰페라다니? 용만이가 폰페라다에서 대학 스탬프 받아야 한다는데...”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보아의 한마디에 다들 멍. 그렇구나, 오늘 일요일이구나. 어차피 대학가봐야 놀기 때문에 스탬프는 받을 수가 없다. 여기가 폰페라다냐 아니냐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거네. 보아는 한마디 할 때마다 정곡을 딱딱 짚어낸다. 역시 무서운 보아.


“이런 센스 덩어리”


 여자의 마음은 갈대, 아니 AB형이라 감정변화가 심한건가. 현정누나의 보아에 대한 평가가 센스 바가지에서 센스 덩어리로 바뀌는데 1분도 안걸렸다.

 

 오늘은 계속 마을과 마을 사이를 통과해 간다. 중간에 전선줄 큰 것과 작은 것이 교차하는 곳 밑으로 길이 나 있는데 그길을 지나다보니 웅웅 거리는 전기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정도면 자기장이 장난 아니라는건데 무시무시하다. 예민한 지영이는 그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며 힘들어 한다.

 

 캄포나라야(Camponaraya)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로 가는 중간에 길이 숲길로 이어진다. 길은 너무 이쁜데 하늘은 점점 흐려져온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판쵸우의를 꺼내 입고 조금 가니 부슬비가 내린다. 현정누나도 이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샌달을 벗고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그랬더니 딱 그치는 비. 이것도 머피의 법칙인가.

 

 

 멀리서 앞서 가는 지영이가 보인다. 주변이 노란색과 초록색 일색이라 빨간색 배낭꺼버를 씌운 지영이가 유독 눈에 띈다.


“누나, 저기 지영씨 보면 무당벌레같지 않아요. 빨간색 배낭커버에, 검은색 바지. 스틱만 위로 올리면 더듬이인데...”

“그러고 보니 진짜 무당벌레 같다”

“이참에 별명 바꿔버릴까요. 구라 지영에서 무당 지영으로”


 내 말에 현정누나 웃어버린다. 무당지영은 좀 심했나. 무당벌레 지영은 너무 길어서 벌레 빼고 무당 지영 한건데, 어감으로는 작두 한번 타줘야 할 것 같다.

 

 현정누나와 말장난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카카벨로스(Cacabelos) 마을이다. 점심때가 다 됐기에 카페테리아에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다. 공짜 타파스에 작은 케익도 서비스로 주고, 점원이 친절해서 더 마음에 든다. 우중충한 날씨에 쳐진 기분을 좀 달래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셀카를 찍는데 보아가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장난을 친다. 그바람에 찍힌 황당한 사진 한 장. 이거 인터넷에 퍼지는 날에는 완전 큰일 나겠다.

 

 

 점심을 먹으며 쉬고 나오니 비가 본격적으로 내린다. 내일 오 세브레이로까지 올라가야 해서 오늘 많이 걸어야 하는데 빗길로 강행군하게 생겼다. 비가 오니 음악 생각이 난다.


“용만아, 비오는 날에 어울리는 노래좀 불러봐라. 비처럼 음악처럼‘


 내 부탁에 용만이가 유재하 버전이라며 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아는 느낌과 사뭇 다르다. 이후부터 계속되는 쥬크박스 용만. 정말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나온다. 대단한다는 말밖에 안나온다.

 

 

 노랗게 물든 고갯길을 넘어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조(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하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이 마을이 크고 볼거리가 많다보니 보통은 여기서 묵고 내일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까지 일정을 잡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비야프란카에서 오 세브레이로까지는 28km, 더구나 경사도가 심한 산길이라서, 차라리 오늘 5km 더 걸어 페레헤까지 가고, 내일 여유롭게 움직이기로 했다.

 

 맥주 한잔만 가볍게 하고 떠날려고 했는데, 구라 세자매는 점심이 부실했는지 여기서 식사를 하고 저녁을 안 먹겠다고 한다. 잠시 후에 따라붙은 소화누님과 어머니도 덩달아 식사하고 가겠다고 하시고, 결국 여성들만 전부 남겨두고 남자들만 알베르게 자리를 맡기 위해 먼저 출발한다.

 

 비야프란카에서 오 세브레이로까지 가는 갈림길이 세 개라는데 어디가 갈림길인지 모르겠다. 페레헤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이정표도 없고 뭐가 뭔지, 결국 행인 한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가던 방향이 맞다고 하는데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비야프란카까지는 그래도 산길이었는데, 여기서부터는 도로 바로 옆을 따라 걸어야 한다. 어차피 마을이니 도로를 따라가면 길을 잃지는 않고 도착하겠구나 안심을 했는데, 계속 가다보니 고속도로 같은 도로와 교차한다. 이게 맞나 의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드는데 그래도 도중에 갈림길이 없었으니 계속 갈 수밖에 없다. 혹시 애초에 페레헤 거치지 않고 다음 마을까지 가는 갈림길로 들어선 건 아닌지 걱정된다. 산길, 더구나 비오는날 29km를 걷고 있으니 체력은 바닥나고, 발은 아프고,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은 없고 이러다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건 아닌지 두려워지는데 표지판이 나타난다. 페레헤 마을까지 1km.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페레헤 마을의 알베르게는 자율로 운영된다. 저녁때 관리인이 와서 숙박비를 받고 스탬프를 찍어준다는데 윗층은 몇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어 텅텅 빈 지하층을 접수했다. 13개 침대가 놓여있는데 9명 자리를 잡으니 완전 아지트다. 마지막에 외국인 한분만 안들어왔으면 완벽했는데, 아쉽다. 샤워실은 뜨거운 물은 잘 나오는데 밑 부분이 뚫려있어서 찬바람이 솔솔, 위에는 뜨겁고 발은 시린 상황에서 샤워를 한다. 참, 별별 경험을 다 하게 해주는 산티아고 길이다.

 

 여성들은 식사를 안하겠다고해서 용만이와 민호와 셋이서 마을에 하나뿐인 bar에 가서 식사를 한다. 다양한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메뉴가 겹치지 않게 다 다른걸 고른다. 양배추 스프는 약간 얼큰하면서 따뜻해서 좋았고, 돼지고기 요리는 살이 잘 익었고, 양념도 약간 매워서 먹을만 하다. 오늘의 선택은 모두가 만족스럽다. 용만이가 몸이 안 좋은지 식사를 다 먹지 못하고 남긴다. 식신이 음식을 다 남기다니, 내일 힘든 산길인데 괜찮을지 걱정된다.

 

 다들 많이 피곤했는지 일찍 쓰러져 잠든다. 내일은 더 힘든 산악지형을 올라야 한다. 벌써 택시 타느니 말들이 많지만 실제로 감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모두들 안다. 다들 무탈하게 갈수 있기를, 내일 몸 상태가 괜찮기를 바라며 나도 침낭속으로 들어간다. 내일은 비가 안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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