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화요일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 -> 트리아카스텔라 (Triacastela) 21km
자다 깨보니 11시 55분. 이런, 12시도 안됐잖아. 보아 옆의 아저씨는 초저녁 그 상태 그대로 코골고 계시고 다른 몇 사람이 거기 합류해 있다. 코골이의 스테레오라, 돌겠군. 또 다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해본다. 내 옆자리 아저씨가 배드벅을 달고 온걸까? 몸이 좀 근질거린다.
요란한 소리에 잠을 다시 깨보니 1시 반 정도. 완전 기차 화통으로 코를 고는 인간이 나타났다. 이건 다른 사람들은 잠자지 말라는 것과 같다. 나 말고도 몇몇분이 깨서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코를 고는지 궁금해서 랜턴 불빛으로 찾아보니 보아 앞자리에서 자고 있는 여자다. 저사람 결혼 했을지가 궁금해진다. 저걸 참고 살아줄 남자가 있다면 기적이다. 그런데 보아는 어제 잠을 못자서 완전 넉아웃 된건가? 주변이 그렇게 시끄러운데도 잘 자고 있다.
도저히 못견디겠어서 매트리스를 꺼내들고 식당으로 간다. 다른 층에서 자는 분 한분도 코골이 때문에 깼는지 식당에 계시다가 내가 침낭과 매트리스를 들고 들어서니 웃으면서 올라가신다. 넓은 식당을 혼자 독차지하고 식탁에 매트리스르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이번에는 배가 슬금슬금 아파오고 두통에 열이 난다. 어제 점심에 먹은 덜익은 돼지고기 탓일까 저녁에 먹은 엉터리로 튀겨진 립 때문일까? 스페인 와서 처음으로 음식 때문에 탈이 났다. 이번 한번으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구수한 된장찌개, 얼큰한 김치찌개가 그립다. 그래도 약을 먹고 나니 어떻게 새벽까지 잘 수 있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머리도 맑고 몸도 개운하다. 방으로 돌아가보니 코골이는 여전하다. 어떻게 이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는지 참 대단들 하다. 특히, 어제 배드벅 때문에 새벽부터 도망나왔던 지영이와 보아가 아직도 안 일어나고 자고 있는건 신기할 지경이다.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억지로 참고 자고 있는 걸까?
일출을 보고 내려갈 예정이니 아침 시간이 길겠구나. 음악을 듣고 있으니 한 두명씩 식당으로 온다. 오늘도 용만이와 민호, 보아, 현정누나는 배드벅에세 폭격을 당했다. 전에 물린데가 붉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에서 더 물려버리니 꼭 수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보고 있는 내가 닭살이 돋는다. 윽~!
보아는 얼굴에 수포까지 나서 터트렸더니 진물이 계속 나와 뺨에 반창고를 3개나 붙였다.
“칠공주파 우두머리 해도 되겠네요”
보아에게 농담을 하긴 했지만, 폭력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선한 얼굴이라 반창고 붙이고 있는 모습도 이쁘기만 하다. 신기하게 나와 지영이만 빈대에 한번도 안물리고 버티고 있다.
“우리가 결론 내린게 있어요. 오빠가 안물리는건 빈대도 낯짝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건 예전에도 들었고. 그럼 지영이가 안물리는건 뭔데?
“빈대도 지영에게는 쫀다.”
빈대도 지영이는 무서워할거라는 보아 말이 그냥 수긍이 된다. 그만큼 지영이 포스가 강하다. 뭐 그래도 물고 안물고는 빈대 맘이겠지만...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영어가 하나도 안된다. 용만이가 커피 대신 코코아를 먹고 싶어하는데 말이 안통하니 서로 답답하다. ‘초콜릿’이나 ‘코코아’ ‘카카오’ 같은 단어를 말해보지만 아주머니 표정은 딱 그거다. ‘저게 뭔 소리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한국팀에 스페인어 할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역시나 없다.
“이 친구가 코코아를 먹고 싶어하는데 말이 안통해서요”
“코코아는 스페인에서 거의 콜라카오(ColaCao) 라고 말하면 돼요”
내 설명에 아저씨 한분이 알려준다. 콜라카오. 스페인에서 파는 코코아 상품명인데, 스페인 전역에서 통한다나. 그 단어를 말하니 아주머니가 그제야 웃으시며 코코아 통을 내주신다. 거참, 주문 한번 하기 힘들다.
아침을 먹고 어제 오 세브레이로로 들어왔던 언덕으로 일출을 보려고 올라가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산 너머 뒤편으로 구름이 붉게 물들어 있지만 아직 일출이 시작될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할것 같다. 찬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기다리니 구름이 점점 밝은 붉은 빛을 내뿜다가 구름의 얇은 장막 뒤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번에 폰세바돈에서 본 구름속에서 솟아오르던 일출이 더 멋있었어요”
내가 생각해도 그때가 더 멋있었다. 더구나 그때는 보아와 단 둘이서만, 오로지 우리만 그 광경을 감상했으니까 더 기억에 남는다.
다시 bar에 들어가 오랜 시간 기다려 일출을 보느라 언 몸을 녹이고 출발하다보니 평소보다 많이 늦었다. 오 세브레이로를 떠날 때 벌써 10시가 다 되어 온다. 이렇게 늦게 움직여 보기도 처음이다. 산 능선을 따라 돌아가다 내리막 오르막이 반복된다. 한참을 가다 갑자기 나타난 가파른 오르막 길. 그 길을 올라가니 도로와 만나는 언덕이고, 바로 옆에 bar 있다.
헥헥거리고 올라왔더니 더 가기도 귀찮아,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너무 늦게 출발해서인지 벌써 정오를 지나고 있다. 아침이라고 빵쪼가리만 먹었더니 힘이 안난다. 뭔가 먹을게 있을까 bar에 들어가보지만 봉지에 포장된 빵만 있다. 에구, 그래도 배고프니 어쩌랴.
대충 허기만 때우고 용만이와 먼저 출발한다. 수다를 안떨기 때문일까? 아니면 씨에스타 시간에 걷기 싫어서 빨리 걷는 것일까? 용만이는 또다시 질주하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내리막길. 그런데 오른쪽 무릎이 이상하다. 계속 내리막 길을 가면서 충격을 받았더니 다시 고장이 나는 것 같다. 예전에 한번 다치고 난후에는 고질병이다. 결국 절뚝거리며 엉금엉금 내려간다. 산티아고 길 초반에는 골반 부위가 안좋다가 그게 나으니까 발목이 이상해지고, 발목이 괜찮아지면 발가락이 문제고, 이제 발가락이 좀 나아가는것 같으니까 무릎이 나간다. 어떻게 돌아가면서 말썽인지. 그나마 한꺼번에 고장 안난걸 감사해야 하나.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서 내려가고 있어 금방 따라 잡힐 줄 알았는데 일행은 고사하고 다른 순례자들도 안보인다. 길을 잘못 들어섰나? 까짓거, 그러면 어때. 아무 마을이나 가서 자고 내일 찾아가지 뭐. 오 세브레이로에서 멈추기 위해 이전까지는 일정을 조정해 왔지만 그것도 끝났으니 이제는 어디서 멈추던 상관이 없다. 산티아고까지 가기만 하면 그만인걸. 어떻게 되던 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순례자 한명이 다가와 빠르게 사라진다. 배낭 매고 내리막길을 거의 달려서 내려가는데, 이런 쌀쌀한 날씨에 반바지, 면티만 입고 질주라니 대단하다. 여하간 사람이 지나갔으니 길은 맞게 가고 있는거네.
저 멀리 꽤 커 보이는 마을이 있다. 저긴가? 아니라도 저정도 크기면 bar는 확실히 있겠구나 싶어 계속 걷는데 길이 빙빙 돌아간다. 그렇지, 조금만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주면 산티아고 길이 아니지. 이제는 멀리 돌아가도 그러려니 한다. 길은 계속 내리막 비탈길인데 조그만 마을들을 계속 지나친다. 길에는 소똥 투성이에 각종 오물, 그리고 모기떼가 쫙 깔려있다. 갈라시아 지방에서 왜 수돗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지 바로 이해가 된다. 진창인지 똥물 범벅인지 알수 없는 길을 계속 내려가서야 아까 봤던 큰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용만이가 너무나 반갑게 맞아준다.
“여기서만 1시간 기다렸어요. 계속 앉아 있을려니 눈치 보여서 맥주를 4잔이나 마셨다니까요. 너무 안와서 제가 잘못 온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날 보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평소라면 10분정도 많아야 20분 정도 차이가 나는 정도인데, 계속 내리막길이다보니 1시간이나 차이가 났다. 내리막은 역시 내겐 쥐약이다.
내가 도착하고 바로 뒤이어 민호와 현정누나가 나타나고, 잠시 후에 보아와 지영이까지 왔다. 오늘은 어디서 묵을지 결정을 안했었기에 이제부터 결정을 해야 한다. 다들 가능한 깨끗한 곳에 가고파 하는데, 마을을 한바퀴 돌았더니 사설 알베르게가 모두 9유로로 올라있다. 정보에는 7유로라고 되어 있는데, 숙박료도 담합하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알베르게를 모두 확인하고는 결국 단지 5유로로 싸다는 이유에서 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간다. 오늘은 배드벅으로부터 무사할까?
알베르게로 들어가는데 한국 아가씨가 인사를 한다.
“배드벅 있을것 같아요?”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장난처럼 물어본건데
“네, 좀 있을것 같네요”
웃으며 말한다. 아니, 이게 웃으며 할 말이야?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빈대있어요’하면 어떻하라는 건지.
여기 알베르게도 오 세브레이로와 같은 시스템이다. 오는 순서대로 침대 배정해 주고 심지어는 스탬프 모양에, 세박비와 건조기 비용부터 기계 모델까지도 다 똑같다. 갈라시아 지방은 이렇게 하기로 합의된 건가?
알베르게가 2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는데 제일 처음 체크인한 나만 왼쪽 건물이고 나 다음부터 다른 일행들은 모두 오른쪽 건물에 배정된다. 방이 4인실이라 누군가는 어차피 떨어져야 하는데 이건 건물 자체까지도 떨어뜨려 주신다. 나 왕따 당한건가? 이게 복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내일 알게 되겠지.
다들 배드벅에 너무 당하다보니 마을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내가 세탁물 담당이 됐다. 그나마 여기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2대씩이라 오 세브레이로처럼 줄이 쫙 늘어서지는 않는다.
원래 키미노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치료비는 무료라고 알고 있었는데 용만이가 갔다오더니, 보아와 현정누님은 보험이 있어 되는데 자기와 민호는 보험이 없어 안된다고 했다나
“그래서 치료 못 받은거야?”
“소화 선생님이 민호씨한테 불쌍한 표정 지어보라고, 그러면 혹 치료해주지 않을까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민호씨가 진짜로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거에요. 그래서 치료 받았어요”
시킨다고 진짜 간호사 앞에서 하다니... 민호 무섭네. 그래도 그렇지 불쌍한 표정 짓는다고 치료를 해줘. 이게 말이 되나? 현정누나가 와서 알려준 진실은 병원인지 보건소인지 그곳 간호사가 착각한 거란다. 전화해서 확인해보더니 전부 다 무료로 해줬다고 한다.
“현정 누나가 주사 맞고 나오더니 ‘살것 같아, 좋아’ 그러고 있는데 보아 누나가 그러는 거에요. ‘주사 성분 그거 같지?’ 그러니까 현정누나가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무슨 플라쉬보 효과냐고요”
용만이가 병원에서 있었던 얘기를 왕창 늘어놓는다. 약성분까지 다 꾀고 있으니 간호사에게 플라쉬보 효과란 기대하기 힘들겠다. 전혀 도움도 안되는 주사 맞고서 ‘살것 같아, 좋아’라고 말하다니 역시 현정누나 답다고 해야 하나.
병원 갔다오고 난 후에 식사를 하러가니 평소보다 저녁이 많이 늦었다. 다들 멀리 가기 귀찮아해서 알베르게 바로 앞에 있는 bar로 간다. 용만이가 낮에 눈치보며 기다렸다는 그곳으로.
이것저것 시켜 같이 먹기로 하고 주문한다. 파스타 샐러드라고 시켰더니 파스타에 참치, 치즈, 햄을 섞어서 준다. 양념 하나도 안되어 있고 차갑기만 한 엄청난 양의 파스타. 배가 고파 다 먹긴 했지만 이거 먹고 탈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솔직히 파스타라 해서 따뜻한걸 기대했는데, 샐러드 계열은 거의 다 차갑다는 걸 깜빡한 내가 바보다. 두 번째 요리로 나온 돼지고기 lomo는 그나마 무난했는데 양이 무지하게 많다. 양으로 승부하는 곳인가.
소화누님이 식사를 안하신다고 해서 8명이 와서 4명씩 나눠 앉았는데 옆 테이블에 세자매는 민호 때문에 웃겨 죽는다. 민호가 어느새 자기 무덤 파는 얘기만 골라서 하더니 점점 드러누워 스스로 흙 덮는 얘기를 하고 있다. 민호는 너무 순진해서 그런가, 꼭 말만 하면 할말 안 할 말 다 해버리고 제동이 안된다.
“노상방뇨로 걸려 검사 앞에 가서 강도죄가 되더라도 입 열지 말고 그냥 인정해요. 민호씨는 입 열면 살인죄 덮어쓰니까”
용만이가 민호에게 충고하는데 진짜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게 민호다.
식사 후 헤어져 나만 다른 건물 내 침대로 간다. 일행과 이렇게 떨어져 자보기도 처음인것 같다. 혼자 있다는게 왠지 낯설다. 그동안 너무 몰려다니다 보니 그 분위기에 익숙해진 걸까. 어느새 정이 너무 들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혼자 떨어질 생각을 안하고 있다. 생각을 안하고 있으니 혼자 떨어지고, 뭐 어떻게 내 의도하고는 반대로만 되는지. 내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