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월요일
페레헤(Pereje) ->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 23km
어제 bar에서 서빙보던 청년에게 물어본 봐로는 7시부터 아침 식사를 할수 있다고 한다. 마을에 bar가 하나뿐이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짐싸는 시간을 생각해서 6시 반정도쯤 일어나면 되겠구나 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2시부터 눈을 떠서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마지막에는 꿈까지 꿨다. 일 년에 몇 번 꾸지도 않는 꿈을 산티아고 길에서 꾸고 있다. 내 배낭이 터져서 짐들이 다 흩어져 오도가도 못하고 돌아가는 꿈. 그런데 일행이 대학때 선배들이다. 이건 무슨 개꿈일까? 놀라서 깨보니 6시 반이다.
지영이와 보아의 침대는 깨끗하다. 일찍 일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배드벅 때문에 새벽 2~3시경부터 깨서 못 자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어머니와 지영이,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배드벅에게 왕창 당했다. 특히 용만이와 보아 현정누나는 얼굴까지 공격당해 붉게 물들었다. 용만이는 오늘도 특이하게 귀를 물리고 보아는 아랫입술을 물렸다.
“내가 키스 고픈 줄 어떻게 알고...”
현정 누나 때문에 다들 대화 수준이 19금을 넘어선지 오래다.
7시에 bar에 가보니 문을 안 열었다. 꽉 닫힌 문. 아무리 두들겨도 반응이 없다. 어제 그 청년이 우리에게 구라 친 건가? 다음 마을까지 빨리 가기로 한다. 어두운 밤길 아니 새벽길을 보름달을 보며 걷는다. 어차피 차도를 따라가면 다음 마을이 나올테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트라바델로(Trabadelo) 마을에 들어서니 문을 연 bar가 있다. 바케트 빵이 딱딱해서 크로아상과 커피를 시켜 아침을 해결한다.
“빵이다”
크로아상 만으로 성이 안찼었는지, 새 빵이 배달되어 오는걸 보고 현정누나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친다. 그리고는, 구라 세자매 또 다시 커피에 보카디요까지 잔뜩 달려주신다.
“카페인 힘으로 달려야 해요. 어제 한숨도 못잤어요”
너무 커피 많이 마시는거 아니냐고 하니 보아가 그런다. 배드벅 때문에 한숨도 못잤으니 그럴만도 하겠구나 싶어지며 안쓰럽다. 나야 배드벅에게 안물리고 있으니 저 가려운 고통을 알 길이 없다.
“점심 안 먹을 거야. 점심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양을 먹었다며 현정누나가 말하는데, 과연 지킬 수 있는 말일까?
트라바델로 마을에 들어설때는 동도 트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이었는데, 아침을 먹고 나오니 날이 환하다. 오 세브레이로로 올라가는 길 답게 계속해서 오르막인데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보니 중간 중간 마을을 많이 지난다.
어제 잠을 못자서 그럴까 지영이가 결국 컨디션이 안좋다며 쉬어가야겠다고 한다. 너무나 지쳐하는 모습이 그대로 두고 가면 아예 주저앉아 더 이상 못 움직일 것 같아 먼저 갈수가 없다. 시간도 12시 쯤이니 식사나 할겸 구라 세자매와 용만이와 같이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점심을 안먹겠다던 현정누나의 말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식당 아저씨 인상이 참 좋은데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한다. 결국 손짓 발짓으로 의사 소통을 하며 어렵게 주문을 하다 결국에는 아저씨가 하는 말에 ‘Si'(yes)를 외치며 그냥 주는데로 먹기로 체념했다. 그랬더니 스파게티 왕창 덜어먹을수 있게 주시고 - 차갑지만 않아도 좋았을텐데, 추운날 차가운 스파게티틑 정말 별로다 - 두 번째 음식은 다들 포테이토에 계란 후라이, 나만 cerdo를 외쳐 돼지고기 요리가 나왔다. 완벽한 주문의 실패. 그래도 아저씨가 달콤하면서 도수 높은 술을 한잔씩 서비스해 주시고, 와인도 나름 맛 좋았고, 독특한 문양의 파이도 후식으로 내주신다. 주문만 제대로 됐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식사를 할 때 외국인 부부가 갓난아이를 안고 들어왔는데, 보아가 너무나 이쁘다며 안아본다. 아기를 안고 있는 보아가 참 예쁘게 보인다. 저렇게 사랑스럽고 정 많은 사람이 어떻게 낯선 노르웨이에서 버텼는지 놀랍다.
아저씨 혼자서 식사를 준비해주다보니 식사 시간만 2시간을 허비했다. 덕분에 쉬기는 왕창 쉬었고 지영이 혈색도 조금 좋아졌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결국 용만이가 지영이 배낭을 매고 가기로 한다. 용만이 DSR과 스틱 2개, 소형 컴퓨터는 내가 가져가고 내 ipod을 줬더니 음악을 들으며 질주하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앞뒤로 배낭매고 잘도 달려주신다. 그런데, 잠깐! 용만이가 내게 준 물건이 스틱 2개면 1kg, DSR도 1kg는 넘고, 소형 컴퓨터도 1kg은 우습게 넘어주실테고, 그러면 뭐냐. 내 원래 배낭무게만 13kg가 넘는데 용만이 짐 무게까지 합치면 17~18kg는 우습다는 말이 된다. 지영이 배낭무게가 8kg라고 했으니 용만이가 짊어진 배낭 2개와 내가 가져가는 무게가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형은 얼마나 살이 없으면 기초근육이 만져져요. 형이 그 배낭 매고 걷는거 자체가 신가하다니까요”
마사지 해줄때마다 그렇게 말하던 놈이 내게 가장 무거운 것만 던져놓고 사라져주셨다. 오 세브레이로로 올라가는 길, 험난하겠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숨이 차오르는데, 술기운 때문에 호흡법이고 뭐고 없다. 헥헥거리며 오르니 더 힘들다.
“승호야, 이 누나 버리고 가면 안돼”
현정누나가 힘들게 올라가며 말하는데, 누나가 볼 때 내가 빨리 올라갈 여력이 있어 보여요. 술기운에 이렇게 헥헥거리는데... 올라가는 내내 술이 안깨서 술냄새 팍팍 풍기고, 숨은 헐떡이며 올라간다. 한참을 올라가니 급경사가 끝나고 나서 산등성을 타고 완만하게 걷는 길이 나온다. 이 때쯤 되니 술도 다 깨서 호흡이 안정되어 온다. 깰려면 진작에 깰것이니 힘든 구간 다 지나고 나니까 몸상태가 정상이 된다. 호흡이 안정되니 주변 풍경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데 경치가 정말 끝내준다. 가는 길 중간에 갈라시아 지방으로 들어섰다는 비석이 나온다. 갈라시아 지방이 경치가 좋다더니 빈말이 아닌가보다. 멀리까지 펼쳐진 산들의 굴곡이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봐온 경치와 사뭇 다르다.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 마을이 하나 보인다. 시간상 여기는 아니겠지 하고 지나갈려는데 작은 비석에 오 세브레이로라고 적혀 있다. 비석을 못봤으면 그냥 다음 마을까지 산을 내려갈뻔 했다.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는데 앞서 갔던 보아가 뒤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된거지?
나처럼 이 마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쳐갔는데, 돌아보니 현정누나와 내가 마을로 들어가는게 보여서 되돌아왔다고 한다. 잘못했으면 보아 혼자 미아 될 뻔 했다.
알베르게에 가보니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해 준다. 예약이 안되니 알아서 할 수 밖에. 어차피 자리는 많으니 밖에서 자는 불상사는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저녁을 안먹겠다던 구라 세자매도 조금은 요기를 해야겠다고 해서 식당을 찾아 마을을 헤맨다. 그러던 중 발견한 Sopa de Ajo 메뉴. 마늘을 듬뿍 넣은 스프라서 우리 입맛에도 맞고 추운 겨울에 먹기 좋다고 들어서 스페인에서 꼭 먹어 보려고 했던 음식이다. 이게 있으니 간단하게 식당 낙찰.
알베르게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해 돌아와보니 세탁은 다 됐는데 건조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미 식당 예약을 다 해놨으니 중간에 누군가가 돌아와서 세탁물을 처리해야 한다. 간단하게 가위바위보 단판으로 결정하기로 한다. 솔직히 노을 지는걸 보기 위해 돌아와도 무방하다는 생각에 주먹만 쥐고 있었더니 바로 걸린다.
일행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는데 여자들은 식당 옆 상점을 구경하느라 바쁘고 정작 주문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건조기 시간 때문에 돌아가봐야 해서 용만이에게 주문을 부탁하고 알베르게로 가서 세탁물 정리를 하고 나니 일몰이 시작되려고 한다.
양떼구름이 쫙 깔린 하늘 멀리 해가 산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그리고 서서히 밀려들어오는 어둠. 산에서 보는 석양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석양과 일출을 보기 위해 오 세브레이로에서 묵어가도록 일정을 조정해 온 보람이 있다.
석양을 보기 위해 시간을 많이 지체했더니 식사가 이미 다 나와 있다. 소파 데 아호는 괜찮게 잘 먹었는데 문제는 두 번째 음식으로 나온 립이었다. 튀겨서 나온 립이라니, 더구나 안에는 잘 익지도 않았고, 뜯어 먹을 것도 없고 정말 맛없다. 스페인에서는 절대로 립 요리는 안먹겠다고 다짐하게 만들 정도다.
“어쩌자고 이런 요리를 시켰냐?”
“아무도 주문할 생각을 안하잖아요. 짜쯩나서 아무거나 시킨거에요”
여자들이 아이쇼핑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제대로 주문을 할수 없었다나,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눈에 선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먹어주기 힘든 요리다. 점심도 그렇고 저녁도 그렇고 오늘은 어째 먹을 복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해는 완전히 졌는데 산 끝자락에 붉은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 덕분에 구름들은 노랗고 붉은 다채로운 색을 보여주고 있다. 멋진 석양에 다들 사진기를 들고 좋은 자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빛이 약하기 때문에 찍어봐야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가 있나. 민호가 한번도 쓰지 않으면서 힘들게 들고온 삼각대를 빌려 사진을 찍으니 색감이 제대로 찍힌다.
석양이 다 진 후에 맥주 한잔하며 수다 좀 떨고 알베르게로 돌아와보니 보아 옆자리 아저씨가 초저녁부터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어제도 잠 못 잤다고 자리를 계속 옮겨서 구석 자리로 이동한건데 하필 옮겨간 자리 옆사람이 공포의 코골이다. 오늘밤 무사히 넘길지 걱정된다. 저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나도 어떻게 밤을 새울지 벌써부터 고민된다. 오늘밤도 이어폰을 꽂고 밤새 음악으로 달려줘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