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0월7일

*고니* 2013. 3. 11. 11:16

10월 7일 목요일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 로그로뇨(Logroňo)

 피곤해서일까. 중간 중간 깨기는 했지만 6시까지 잠을 잤다. 코를 곤다던 앨빈은 오히려 조용하게 잘 잔다. 다른 사람들의 코골이에 잠을 조금 설쳤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 1층으로 내려가 짐을 챙기고 있으니 어제 식당에서 서빙을 해주던 아저씨가 나타나 카페테리아 부스를 연다. 어제 받은 아침 식사권을 주니 커피와 쥬스 1병, 빵2개를 준다. 빵이 부드러워서 먹기 편하다.

 

 오늘은 로그로뇨까지 20km를 걸어가야 한다. 거리가 약간은 적다보니 다들 늦장을 부려 8시가 넘어 출발한다. 어제 무리를 해서 걸었더니 발목이 부어있고, 신발을 신으니 뒤꿈치가 아파온다. 왼발은 뒤꿈치, 오른발은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있어 빨리 걷고 싶어도 걸을 수가 없다. 사진을 찍으며 걸으니 점점 뒤쳐져서 결국 일행은 보이지 않는다.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일행이 기다려주면 억지로 따라붙어야 하니 차라리 이게 잘됐다 싶다. 어차피 느리게 걸을수 밖에 없으니 느긋하게 경치구경을 즐기며 걷는다. 그동안 너무 빨리 앞만 보고 걸어왔으니 이제라도 천천히 주변을 보며 걸어가라고 발이 아픈거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오늘도 벌판을 가로지른다. 어제와 차이가 있다면 구불구불 고개와 언덕을 계속해서 넘어간다는 정도 뿐이다. 그나마 오늘은 구름이 조금 깔린 흐린 날이라 걷기에는 괜찮은 날씨다 했더니 날이 점점 더 흐려지더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우의를 꺼내 입으니 언제 빗방울 떨어졌냐며 뚝 멈춘다. 우의를 벗으면 비가 오고 입으면 멈추고 이게 무슨 똥개 훈련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나중에는 포기하고 하늘이 개건 흐리건 그냥 한동안 우의를 입고 걸어버렸다.

 

 앞뒤로 인적이라고는 없고, 걷는건 힘들고, 갈증도 해결하고 배도 채울겸 길가 포도밭에서 한송이 따먹으면서 천천히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우리나라 포도보다 알은 작지만 달고 나름대로 맛있다. 다만 알이 작다보니 포도씨가 계속 입에 걸려 뱉어내는 것이 조금 번거롭다.

 

 

 고개도 넘고, 도로도 따라 걸어가고, 벌판도 가로지르고, 우로 좌로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멍하니 아무생각없이 걷다보니 비아나(viana)다. bar에 혹시 일행들이 있지 않을까 하고 살펴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맥주광인 용만이 녀석이 bar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는데, 내가 너무 뒤쳐진 걸까? bar를 차례로 확인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비아나 도시 밖까지 나와버렸다. 허름한 창고같은 건물 앞에 벤치가 있어 쉬어간다. 다행히 발에 잡힌 물집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오늘도 사과 한 개로 점심을 해결한다. 어떻게 예전에 캐나다 여행할 때와 똑같은 패턴이 돼 버렸다. 아침은 빵, 점심은 과일 몇 개, 저녁은 해먹거나 사먹거나.

 

 

 비아나에서 로그로뇨로 가는 길도 벌판과 고개의 연속이다. 주변에서 볼거라고는 포도밭 뿐이다. 더구나 날씨까지 흐렸다 개기를 반복하고 있어 우중충하다. 라 리오하(La Rioja) 를 통과하는데 천둥소리가 들리고 날씨가 흐려지는게 느낌이 안좋다. 도로 밑을 지나는 터널에서 옷을 벗고 우의를 제대로 챙겨 입고 길을 나서자마자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깨알같은 우박이 떨어지기를 몇분. 이내 비로 바뀌어 줄기차게도 내린다. 까딱 잘못했으면 쫄딱 젖을뻔 했다.

 

 비를 맞으며 언덕을 돌아 올라가니 언덕 밑으로 로그로뇨 도시가 보인다. 도시 중앙에 높게 보이는 성당 첨탑.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신시가를 보면서 저기를 통과해서 가야한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계속 시골 동네만 지나다보니 왠지 도시가 낯설다.

 

 

 진창으로 변해버린 언덕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데, 로그로뇨 도시로 들어갈때쯤 비가 그친다. 로그로뇨 도시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표지가 헛갈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으니 바로 옆에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다고 알려준다. 다리 입구에 떡하니 서있는 인포메이션 센터.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걸 못보고는 카미노 표시만 죽어라 찾고 있었다. 인포메이션 센터 안에 들어가니 지도가 비치되어 있고, 안내원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알베르게 위치를 물으니 지도에 위치와 어떻게 가야할지 길을 표시해준다.

 

 알베르게 앞에 와보니 사람들이 알베르게 앞에 진을 치고 있다. 보아는 아예 낮은 담벼락 위에 길게 다리를 쭉뻗고 앉아있고 다른 일행들도 순례자들에 섞여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알베르게가 2시에 문을 여는데 지금 시간이 1시 40분이다.


“언제 도착했어?”

“얼마 안됐어요. 형보다 한 10분 빨리 왔나..”


 고작 10분 차이인데도 시야에서 안보였다니. 거리로는 상당한 차이가 시간으로는 얼마 차이가 안난다.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숙박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지영이가 들어선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오기 때문에 우리보다 8km는 더 걸어야 하는데 나하고 시간 차이가 고작 30분이다.  아무리 지리산 산골 출신이라지만 너무 잘 걷는 것 아닌가.


“도대체 몇시에 출발했기에 이시간에 온거에요?”

“7시 되기전이었는데...한 6시 45분쯤 됐을거에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 늦잠 자는 민호를 깨워서 7시도 되기전에 출발해 왔다니 참 대단한 지영이다. 그러고 보면 민호가 지영이는 무지 무서워한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천천히 몸 상태를 점검한다. 오른발 뒷꿈치에 생긴 물집은 그대론데 왼쪽 새끼 발가락에 잡힌 물집은 아침보다 조금 더 커져있다. 이걸 터트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버님이 그냥 밴드로 테이핑만 하고 걸으라고 충고하신다.

 

 용만이는 로그로뇨 대학으로 스탬프 받으러 가고, 민호는 물집 때문에 힘들다고 뻗어버렸다. 소화누님과 지영이도 힘든 것 같고해서 아버님과 어머니하고 저녁거리를 찾아 시내 구경을 나선다. 한 아주머니가 찬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앞에서 걸어오신다. 저쪽으로 가면 슈퍼마켓이 있겠구나 싶어 올라가보니 로그로뇨 대성당이 나온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보니, 로그로뇨 대성당 광장주변으로 카페테리아, bar,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대성당 구경을 하며 한바퀴 둘러보는데 소화누님과 지영이가 케밥집으로 들어가는게 보인다. 알베르게에서 쉬고 있는줄 알았는데 언제 나왔지. 배가 고파서 쉬지도 못하겠어서 나왔다는 두 여성분,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시켜놓고는 목이 빠져나 음식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눈에 들어와 박히는 밥과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결국 다들 식사를 주문한다. 야외 테이블로 나가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보아와 현정누나가 대성당 구경을 하면서 걸어오는게 보인다. 결국 둘도 합류. 어떻게 얘기도 안하고 제각기 나왔는데 이렇게 다 모여버리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용만이마저 나타난다면 대박인데...”


일행중에서 빠진 사람은 자고 있는 민호와 대학에 간 용만이 뿐이다. 민호는 지영이가 식사를 사다주기로 했다니 나올리 없을테고, 용만이만 오면 되겠다 싶어 말을 했는데, 진짜로 용만이가 나타나버렸다. 대학에서 만난 정호씨와 같이 돌아오다 배가 고파 식당을 찾고 있었다나... 말 안해도 알아서 다 모여버리니 놀랍다 못해 황당하다. 로그로뇨가 작은 동네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다 모일수가 있지. 진짜 질긴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나?

 

 배가 불러오니 졸음이 쏟아진다. 비 맞으며 힘들게 걸어왔으니 안피곤하면 그게 이상한거겠지. 일행과 헤어져 먼저 돌아와 낮잠을 잔다. 자고 일어나니 발목이 또 걱정된다. 이 상태로 내일 제대로 걸을수 있을까? 왼쪽 발목이 안좋아 절뚝거리며 평소와 다른 걸음걸이로 걸어왔더니 양발이 다 부어있다.


“형도 나가서 발 담그고 붓기 좀 빼세요”


 용만이가 내 발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발을 담그라니 어디에?

 

 알베르게 앞마당에 조그만 분수가 있는데 나가보니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쉬고 있다. 원래 이게 족욕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뭐 알수야 없지만 다들 하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겠지. 물이 너무나 차갑다. 그늘져 햇볕도 들지 않는데 물이 차갑다보니 처음에는 기분 좋던 것이 조금 지나자 발이 시려온다. 발을 담그고 나니 좀 얼얼하기도 하고 어쨓든 한결 편한 느낌이다.

 

 

 알베르게 앞마당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소화누님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조금 목소리 톤이 높아져 있다.


“...내가 이렇게 잘 걸을줄 몰랐다...나도 여기까지 온게 신기해...”


 소화누님은 산행이나 트랙킹 경험이 없다. 평소에도 잘 걷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분이 언제나 마직막으로 도착하시지만 꾸준히 잘 따라오는거 보면 나도 신기하다. 일주일째 걷다보니 걷기라면 어느정도 자신있는 나도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울때가 있는데, 물집이 잔뜩 잡힌 발로 느릿느릿 따라오시는 소화누님보면 대단하다 싶다. 소화누님도 본인 스스로가 대견한지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러다 우리 엄마 내가 산티아고 완주하면 잔치 벌릴지 몰라...”


설마, 산티아고 완주했다고 잔치를 벌릴까? 어머님이 소화누님과 비슷한 분이라면... 음, 가능성이 충분하다. 로그로뇨까지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소화누님이 조금 흥분하신거 같다. 더구나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에서부터 28km를 걸어서 우리를 따라잡으셨으니 그 기쁨이 더 크시겠지. 그래도 그렇지 로밍된 핸드폰으로 수다라니... 이러다 귀국후 잔치 벌리기도 전에 통화료 청구서 보고 기절하시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케밥을 너무 잘 먹었더니 다들 저녁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까 대성당 근처에서 하몽이 줄줄이 걸려있는 bar를 하나 찾았다고 하니 용만이는 무조건 맛보러 간다고 한다.


“여행을 왔으면 현지음식을 맛봐야죠. 스페인와서 제대로 된 하몽맛을 안본다는건 말이 안돼요”


누가 식신 아니랄까봐, 먹는거 하나는 확실하게 챙긴다. 피곤해하는 사람들은 남겨두고 아버님과 용만이와 함께 맥주 한잔을 하러 나가는데 보아와 현정누나가 따라나선다. 아까 보아둔 bar를 찾아가는데 바로 옆 bar에서 카를로스와 루이스가 앉아 있다. 카를로스와 루이스는 어제 로스 아르코스에서 묵었고, 오늘도 늦게 도착해 우리가 묵는 협회 알베르게에 들어오지 못했다. 다시 못볼줄 알았는데 만나게 되니 현정누나가 너무나 반가워한다. 현정누나는 그냥 쉴려다가 맥주 한잔만 하고 자자는 보아말을 듣고 따라나선건데 이렇게도 만나게 된다. 카를로스와 루이스 그리고 현정누나도 대단한 인연인것 같다.

 

 

 

 Bar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하몽을 보고 용만이 녀석 너무나 즐거워한다. 다 맛을 보지 못하는게 한스러운듯 한참 고민하다가 골라온 하몽, 오리손 산장에서 봤던 싸구려 하몽과는 색깔부터가 다르다. 맛을 보니 숙성도 너무나 잘되어 있다. 첫 맛은 약간 짠것도 같은데 뒤 끝맛은 약간 비릿한 치즈맛이 난다. 하몽 자체만 먹기보다는 빵에 싸먹으면 좋을것 같은데 용만이는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가며 먹는다. 어쨓든 찾아오기는 잘 찾아온 것 같다. 지역마다 심지어 각 조각마다 맛이 다 다르다는 하몽. 다음 도시의 하몽맛은 어떨지 기대된다.  시원한 맥주 한잔에 조명을 받아 붉게 물들은 로그로뇨 대성당을 구경하며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하루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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