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0월 8일

*고니* 2013. 3. 11. 11:27

10월 8일 금요일

로그로뇨(Logroňo) -> 나헤라(Najera) 29km

 고성방가 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 2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다. 말소리는 분명 스페인어. 스페인에서도 고성방가를 하는구나 신기하면서도 숙면을 방해하는 소리에 짜증도 난다. 고성방가하던 사람들이 사라지니 코골이 소리가 갑자기 높아진다. 참 골고루 잠 못자게 하는 밤이다. 5시까지는 잘려고 했는데 결국 코골이 소리에 일찍 일어나 버렸다. 일어나라고 고사를 지내주시는데 일어나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오늘은 나헤라까지 30km 가까이 가야 하기 때문일까, 새벽부터 서둘러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짐을 가지고 식당으로 가보니 이미 지영이, 민호, 소화누님은 짐을 다 싸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지영이야 언제나 부지런하니까 그렀다 치지만 민호와 소화누님까지... 일찍 출발할거라고 했더니 버리고 갈까봐 걱정됐나.

 

 가지고 있던 과일, 빵, 과자등 잡다한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6시가 조금 넘어 출발한다. 어둠에 쌓여 있는 도시는 인적이라고는 없다. 공사 구간이 많아 표지 찾기가 어렵지만 어제 인포메이션 센타에서 받았던 지도로 미리 길을 확인해 뒀기 때문에 헤매지는 않는다.

 

 로그로뇨 신시가지를 지나 공원을 가로질러 도시 외곽을 빠져나간다. 도시를 나와 언덕길을 올라갈때쯤 뒤편으로 구름이 살짝 붉게 물들어 온다. 조만간 어둠이 걷히리라.

 

 갑자기 제방같은 둑이 나타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워 이게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아니면 강인지 구별이 안된다. 지도를 봐도 이쯤에 저수지가 있다는데 여기가 맞는지 확신은 들지 않는다. 어디쯤 왔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가다보면 뭐가 나오겠지. 잠시 쉬고 걷기 시작하니 어스름이 걷히며 날이 밝아온다.

 

 물집을 밴드로 테이핑 해두었기 때문에 어제보다는 걷는게 한결 편하지만 그래도 발목 통증은 여전하다. 보아와 지영이가 나란히 선두로 걸어가고 그 뒤를 일행들이 줄줄히 따라가는데 점점 개인간 거리가 벌어진다.

 나바레떼(navarrete)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와 나란히 연결된 길이 나온다. 차도를 따라 길게 펼쳐진 철조망엔 저마다 나뭇가지로 만들어 꽂아 둔 십자가가 수도 없이 걸려 있다. 길을 걸으며 이런걸 만들 기운이 있다는게 놀랍다. 길을 걷는 도중에 왼쪽 언덕위에 설치된 황소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인것도 같은 황소 조형물은 온통 시꺼먼 색인데 황소 불알만 빨갛게 칠해져 있다. 불알까지 굳이 형상화했어야 하나 싶은데 그걸 또 저렇게까지 두드러지게 칠해 시선을 끌다니 이해가 안된다. 

 

나바레떼(Navarrete)에 들어가기 직전에 해가 떠올랐지만 산 위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해돋이를 볼 수는 없었다. 카페테리아에 들어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시 쉬어 간다. 아침 일찍 출발했기에 12km나 걸어왔는데도 아직 9시 정도밖에 안됐다. 이런 식이면 씨에스타 시간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려나.

  배도 채웠겠다 새로운 기분으로 힘내서 걸어볼까 하는데 나바레떼를 나가자마자 길은 도로를 따라 걷는 아스팔트길 아니면 자갈이 곳곳에 박혀있는 딱딱한 흙길이다. 바닥은 딱딱해서 충격은 그대로 오고, 굴러다니는 작은 자갈들 때문에 조금씩 미끄러져서 발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체력 소모도 많고 걷기에 좋은 길은 결코 아닌데, 이런 길이 고속도로를 따라 쭉 이어진다. 에휴, 겹경사 아니면 복상사라더니, 발도 안좋고 많이 걸어야 하는 날에 길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날이 흐려 하늘도 별볼일 없고, 볼만한 주변 풍경이 없는 길을 걷다보니 정말 아무생각 없이 멍해진다. 그냥 기계적으로 걷다보니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나헤라 11km’라는 표시가 도로에 적혀있다. 잠시 쉬었다 가야하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언덕 위 bar에서 민호가 손을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 길에서 벗어난 언덕인데 bar표시를 보도 다들 올라갔다. 이제는 bar만 보면 알아서들 멈추고 맥주 한잔하는게 기본이 됐다. 산티아고 길을 시작한지 8일째인데 하루도 안거르고 맥주를 마셨다.


“너하고 난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 산티아고 가는 길)가 아니라 카미노 데 카냐(camino de caňa , 생맥주의 길)다.”


 용만이하고 매일 맥주를 마시다보니 저절로 나온 농담인데 진짜 말이 씨가 되버렸다. 생장피드포르를 출발해서 산티아고 입성할때까지 하루도 안거르고 맥주를 마셨으니. 어쨓든 오늘도 한잔. 그 시원함에 몸이 좀 풀린다. 앉은 김에 점심거리로 요기도 하고 충분히 쉬어간다.

 

현재시간 12시, 남은거리 11km니 2시간 이상 걸릴테고 2시 반에서 3시쯤 도착할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나란히 선두로 걷는 보아와 지영이가 이번에도 앞서 가는데 도중에 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빠르게 앞으로만 전진한다. 마땅히 쉴 그늘도 없어 그 둘을 무작정 따라 걷다보니 벌써 1시 40분. 한 4~5km 남았겠구나 싶어 다음 벤치가 나오면 무조건 쉬어가야지 생각하는데 도로에 설치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산토 도밍고(Sto. Domingo de la Calzada) 20km... 내일 목적지 산토 도밍고가 여기서 20km라니  어떻게 된거지? 의아해하며 조금 걸어가니 앞쪽에 나헤라 1km 표지가 있다. 이럴수가, 10km를 1시간 40분에 주파하다니. 거의 시속 6km 속도다.


“무슨 여자들이 이렇게 빨리 걸어요. 군대가서 전투 행군하면 딱이겠네. 지영씨는 공병가고, 보아씨는 의무병으로 자원해요”


내가 군대나 가라고 하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나 군대 체질이라는 말 자주 들었는데...”

“나도 들었는데...”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런, 이 사람들 진짜 군대로 보내야겠다.

 

 조금더 걸어가자 체육관 같은 건물이 보이면서 나헤라 신시가 입구로 들어선다. 나헤라까지 1km라고 안심하고 걸었는데 한가지를 간과했다. 표지판의 의미는 나헤라 입구까지 1km라는 말이지 알베르게까지의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화살표는 신시가를 한참을 가로질러 마을 반대편의 다리 넘어 구시가로 이어지는데 알베르게 표시는 다리를 건너면서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표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서야 알베르게가 보인다. 알베르게에 도착할때쯤 다들 녹초가 되어 있다. 알베르게가 이렇게 반가울수가 없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보니 도착한 사람들은 몇 안된다. 진짜 지영이와 보아가 빨라도 너무 빨리 걸었다.

 

 단층 건물로 된 나헤라의 알베르게는 커다란 방 하나에 수많은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정보에는 92명 수용이라고 나오는데 전원을 한방에 재우는 독특한 곳이다. 기부금으로 운영하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친절하다. 이곳 알베르게는 앞마당에 햇볕이 너무나 잘들어서 빨래를 널어놓으니 2시간도 안되서 다 말라버린다.

 

 알베르게 주방시설이 매우 잘되어 있어 저녁 식사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지친 일행들을 쉬게 남겨두고 용만이와 둘이서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왔는데, 알베르게 근처에 이렇다 할 슈퍼마켓이 보이지 않는다. 용만이가 오는 길에 슈퍼마켓을 봤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처음 나헤라 도시로 들어왔던 입구까지 되돌아온다.

 

“야, 이놈아, 입구까지 돌아오는 거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말했잖아요. 들어오다가 봤다고”


이런, 오다가 봤다고 들어서 마을 중간쯤이려니 생각했는데, 들어오다가 봤다니 미치겠다. 알베르게에서 여기까지 왕복 거리면 3~4km는 우습게 나올텐데, 도대체 내가 오늘 몇km나 걷는거야.

 

 어쨓든 큰 슈퍼마켓이 2군데나 있는건 좋은데 씨에스타 시간이라 문이 닫혀있다. 근처 벤치에 앉아 슈퍼마겟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카를로스와 루이스가 지나가는게 보인다. 여성 2분이 동행하는데 오늘은 카를루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여성분의 배낭을 잡고 루이스가 걸어가고 있다. 오다 만난 일행인가? 알고보니 휴가를 얻어 몇일만 같이 걷기 위해 온 루이스의 부인과 딸이었다. 현정 누나 때문인지 괜히 카를로스와 루이스를 보면 친근하게 느껴진다.

 

 5시를 한참을 지나 슈퍼마켓이 문을 연다. 이렇게 중간에 쉬어가며 장사하며 살수 있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장을 봐서 돌아오는데 어째 쌀이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걱정이 된다. 까짓거 부족하면 근처에서 어떻게 조달해보면 되겠지하며 돌아와보니 아버님이 근처에서 닭고기를 보았다고 하신다. 순식간에 저녁 메뉴는 갑자기 닭볶음탕으로 결정된다. 닭만 먹으면 체하는 나를 위해 어머님이 특별히 따로 볶음밥까지 해주신다. 요리 강습 하신다더니 다들 반해버릴 정도로 어머니 음식 솜씨가 너무나 좋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식후에는 숭늉까지, 이런 호사가 없다.

 

 1947년부터 문을 열었다는 bar가 있어 소화도 시킬겸 한잔하러 다같이 간다. 오래된 집 답게 하우스 맥주맛이 아주 특이하다. 비터의 쌉쌉하면서도 라거의 부드러운 느낌까지 함께즐길수 있는 독특한 맛이 아주 좋다. 어제는 하몽이 제대로더니 오늘은 맥주가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강가 테라스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대화가 무르익어 간다.

 

 제각기 따로따로 스페인에 왔는데 이렇게 먼 이국 땅에서 단체로 우루루 몰려다니게 되다니 인연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등산과 트랙킹에 지식이 많은 아버님, 요리에 능한 어머니, 특히 밥 잘하는 만능 지영이에, 마사지에 능한 기쁨조 용만이, 간호사 보아와 현정누나, 학원원장님 답게 친화력이 좋은 소화누님에 복지사가 꿈일 만큼 착한 민호까지 이렇게 다양하게 모이기도 쉽지가 않다. 모이더라도 이 많은 인원이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니 놀랄 따름이다. 우리들은 전생에 무슨 끈으로 연결되었기에 머나먼 스페인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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