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화요일)
푸엔뗴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에스테야(Gares-Estella)
일어나 시계를 보니 12시 43분. 고작 3시간 좀 넘게 잤다. 몸이 피곤한데 왜 이렇게 일찍 깼을까 의아했는데, 바로 이해시켜주시는 코골이. 2층 침대 6개가 들어있는 도미토리 방에 남자라고는 용만이와 아버님, 민호, 그리고 나 뿐이고, 나머지 8명은 여자다. 민호도 평소보다 심하게 코를 골고 있지만 민호 코골이는 가볍게 눌러주는 막강 코골이 소리. 아버님은 조용하시고, 난 당연히 아니고 그럼 용만인가? 코고는 소리가 용만이 쪽에서 들려 용만이 이녀석을 확 깨워버려 그러고 있는데 소리가 이상하다. 침낭속에서 귀를 막고 듣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용만이가 아니라 용만이 뒤에서 들리고 있다. 그쪽은 여자들인데... 벽쪽에서 잠자고 있는 서양 여성분의 코 고는 소리였다. 내 주변에는 코고는 여성분이 없다. 그래서 여자니까 남자보다는 코골이가 약하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이분 그게 나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는지 천둥치는 듯한 코골이로 확실하게 일깨워주신다. 문제는 내 잠도 같이 확 깨워버리고 있다는 것.
알베르게는 숙박료가 저렴한 대신 적을때는 4명 정도, 많을때는 100명 정도가 한방에서 자게 된다. 4명이 잔다고 조용한 것도 아니고 100명이 함께한다고 시끄럽기만 한것도 아니다. 문제는 같이 자는 사람이 누구냐는것. 그런데 그건 누구도 알 수 없고 그때 그때 다르다. 한마디로 복불복이다.
무지막지하게 코고는 여성분도 놀랍지만, 이 소리에도 깨지 않고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이 오는지... 아직 1시도 안된 시간. 밤새 뜬눈으로 지새면 내일 걸을 수가 없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크게 틀었다. 코골이 소리가 여전히 들리지만 음악 소리에 어느 정도 묻히니 잠을 청할 수는 있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으니 스페인에 있다는 느낌이 없어진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는데 다시 눈을 뜨니 5시 반. 더 이상은 자기도 뭐해서 짐을 싸서 식당으로 내려간다. 한국에서는 출근 때문에 5시에서 5시 반 사이에 일어났는데, 스페인에서도 5시 정도면 잠을 깬다. 시차가 있는데도 왜 그 시간에 눈이 떠지는지 이해가 안된다.
다들 아침거리가 없어 가다가 대충 해결하겠다고 한다. 어제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그렇게 하면 가기 전에 쓰러질 것 같다. 결국 비상식으로 싸들고간 라면을 아버님과 둘이서 끓여 먹는다. 아침부터 라면을 먹으니 속이 좀 부대끼기는 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는 포만감이 너무 좋다. 그리고 맛있고...
배도 채워겠다 출발할려고 짐을 점검하는데 아뿔싸, 디지털카메라 충천하는 것을 깜빡했다. 카메라 배터리는 완전히 나가기 직전이다. 이러면 오늘 사진을 하나도 찍을 수 없다. 나보다 더 산티아고 길을 가고 싶어했던 누나를 위해 계속해서 길을 찍어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 다들 먼저 보내고 잠시나마 충천을 한 후에 뒤따라간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간만에 혼자가 되어보니 조금은 두렵고 낯설지만 그 나름대로 설레는 느낌이 있다. 이대로 천천히 걸어서 완전히 뒤쳐져 헤어져버릴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제까지는 민호와 소화누님을 지영이에게 떠맡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용만이 일행에 보아와 현정누나까지 가세해서 함께 떠났으니 부담감도 없다.
결국 걷다보면 언젠가는 만나겠지 하면서 가는데 오늘도 경치가 장관이다. 11세기에 여왕 우라카의 지시로 만든 다리를 건너 레이나를 빠져나오자 숲을 지나 멀리 보이는 낮은 산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새벽에 잔뜩 끼어있던 구름이 해가 나오면서 흩어져 점점 사라지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을 쳐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산 밑의 언덕길이다. 원래 오르막을 남들보다 잘 올라가는 편인데, 경치에 취해있다보니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언덕 꼭대기에 도착할 때 쯤 소화누님과 현정누나가 보인다. 내가 한참 뒤에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얼마 못갔다 했더니, 오는 길에 어제 본 빵집에서 아침을 먹고 점심거리도 사다보니 시간이 지체됐다고 한다.
난 원래 좀 빠르게 걷는 편이다. 작정하고 걷는다면 일행 중에 용만이 말고는 따라오지 못할거다. 그나마 골반 통증 때문에 조금 천천히 걷는건데, 걷다보면 멍해지고 통증에 둔감해지다보니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빨라져 버린다. 주변 풍경에 정신을 뺐기니 어느 정도로 걷고 있는지 자각을 못한다. 레이나 다음 마을인 마녜루(Maňeru)를 지나갈 때 땅에 떨어진 무화과를 줍고 계신 아버님, 어머니, 보아를 지나치더니 결국에는 모두를 앞질러 씨라우꾸이(Ciraugui) 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간다.
길은 씨라우꾸이의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 마을 꼭대기의 첨탑쪽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내려가 마을을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첨탑 앞 광장까지 올라가서 기다리는데 가장 뒤에 오던 소화누님이 도착하도록 미영이와 용만이가 안나타난다. 내 바로 뒤를 따라서 씨라우꾸이에 들어왔을텐데 어디로 갔지? 다들 미영이와 용만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가다보면 만나겠지하면서 태연한척 하시지만 그래도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걱정하는 눈치다. 혹시 마을 꼭대기까지 올라오기 싫어서 그냥 옆으로 돌아서 가버렸나? 아니면 어디 bar라도 들어가 쉬고 있나? 의심은 되지만 확신은 없다. 계속 씨라우꾸이에서 기다리고 있을수는 없어 출발한다. 그래도 지영이가 용만이랑 같이 있으니 오늘 목적지 에스테야에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씨라우꾸이는 언덕위에 만들어진 마을이다보니 마을을 빠져나가자마자 사방이 확 트이며 멀리까지 보이는데, 그 경치가 장관이다. 앞에 펼쳐진 길위에 지영이나 용만이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혹시 뒤에서 따라오고 있지는 않을까 길을 걸어가면서 자꾸 뒤를 쳐다보게 된다. 자꾸 뒤돌아보면서도 똑부러지는 지영이가 같이 있는데 무슨일이야 있겠어하는 생각에 발걸음은 자꾸 빨라져 또다시 일행들을 앞질러 가고 있다. 그렇게 가다보니 일행들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 뒤에 따라오는지 보이지도 않게 됐을 무렵 로르카(Lorca)로 가는 길목에서 지영이와 용만이가 앞에 가고 있는게 보인다. 다들 걱정했는데 이렇게 앞서 가고 있었다니 황당하다. 어떻게 된일인지 묻는 나에게 도리어 반문한다.
“씨라우꾸이 들어서서 앞에 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는데 형이 안보이는 거에요. 마을을 나왔는데 멀리도 안보이고. 그래서 형이 확 질러서 가버린줄 알고 쉬지도 않고 걸어왔어요”
앞 사람들을 따라서 걸었다고, 도대체 그 순례자들은 뭘 본거지?
“첨탑 있는 쪽으로 올라온거야? 마을 꼭대기로?”
“아뇨 마을을 돌아서 통과하던데요”
나중에 알았다. 마을을 우회하는 길과 마을 꼭대기 첨탑쪽으로 올라가는 길, 2개로 갈라졌다가 합쳐진다는 것을. 대부분의 순례자는 우회로 표지는 보지도 못하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우회로 표지를 본 사람을 따라갔는지, 남들 못보는 걸 보고 누군지 참 눈도 좋다. 그냥 대충 사람들 따라서 올라올 것이지.
뒤따라오는 일행들을 기다리며 잠시 쉬어가겠다고 해서 지영이와 용만이를 지나쳐 먼저 로르카 마을에 들어섰다. 날도 덥고 한참을 걸었더니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알베르게 표시가 보여 가보니 바로 반대편 앞에 bar가 있다. 알베르게에도 탭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bar를 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알베르게 반대편의 bar에 있어 따라 들어간다. 나만 그러는줄 알았는데 식당도 사람 많은 곳에 사람이 몰리듯이 이상하게 별 차이 없는데도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쪽 bar로만 들어온다.
생맥주를 주문하니 다른 용량의 컵 3개를 보여주며 어느것으로 하겠냐고 묻는다. 여태까지는 카냐(생맥주)를 주문하면 묻지도 않고 유리컵에 한잔 줬기 때문에 다른 크기의 잔으로도 판다는 것을 몰랐다. 컵 크기에 따라 다르게 판매한다는 것을 이 알베르게에서 처음 알았다. 작은 잔에 마시자니 한모금에 끝날것 같고, 큰잔을 마시자니 술에 취해 휘청거릴까봐 걱정이 돼서 중간 크기로 시킨다. 시원한 맥주가 들어가니 갈증이 한결 가시며 살 것 같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리고 어차피 여기서 잠시 쉴테니 그동안 카메라 충천을 하면 될 것 같다. 주인 아주머니한테 디지털카메라와 충전기를 들고가서 보여주니 충전을 시켜 주신다. 역시 어디서나 바디 랭귀지는 통한다. 영어를 신봉(?)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겠지만 산티아고 길에서는 어설픈 영어보다 손짓, 발짓이 더 유용하다.
맥주 한잔을 다 마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일행들이 나타난다. 다들 강한 햇볕에 계속 걸어오느라 지쳐 있다. 커피와 맥주를 시키고 각자 가지고온 빵을 꺼내 점심을 먹는다. 내가 챙겨온 빵과 곡물 비스켓 그리고 잼을 꺼내어 놓으니 보아와 현정누나가 놀란다.
“아니 이걸 여태 들고 다녔어?”
사실 곡물 비스켓과 잼은 원래 보아와 현정누나가 가지고 온 거였다. 생장피드포르에서 노르웨이에서 먹던 음식을 보고는 너무 반가워서 샀는데, 문제는 잼이 유리병에 들어있어 무게가 상당히 나간다. 그걸 지고는 피레네를 넘었더니 너무 힘들었다며 수비리에서 식사할 때 꺼내놓고는 반도 먹지 못하고는 버리라고 놓고 갔었다. 버리자니 너무 아깝워서, 더구나 주말이라 슈퍼마켓도 문을 안여는데 음식을 버릴수는 없어서 챙겨 넣었는데 어쩌다보니 먹지도 않고 계속 짊어지고만 다녔다.
“다른 용기에 옮겨 담고 유리병은 버리고 올 것이지...”
유리병째로 가지고 온거에 황당해하면서도, 꺼내놓으니 현정누나가 가장 잘 먹는다. 다들 배가 고프다보니 가지고 있던 음식물을 깨끗하게 없애 버렸다. 덕분에 배낭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점심을 해결하고 힘내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정오를 지나서인지 햇볕이 너무나 강하다. 씨에스타 시간대에 나무 그늘도 없는 들판길을 걷고 있으니 몸이 축 늘어지는것 같다. 보이는 거라고는 들판과 쭉 벋은 흙길뿐, 다음 마을까지는 가야 쉴 곳이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이 빨라진다.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 마을에 들어서니 길 옆에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쌓인 조금만 공원이 있다. 나무그늘 밑 벤치에 앉아 신발도 벗고 쉬고 있는데 일행들이 지나간다. 옆으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데, 모두들 앞만 보고 그냥 쭉 가고 있다. 너무 걷기에 집중한 것일까? 아니면 강한 햇볕에 지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는 것일까? 남은 기껏 기다려 준다고 앉아 있는데 그냥 쌩하니 다들 지나가버리니 허탈해진다.
신발을 얼른 신고 일행을 따라간다. 마을에 들어올때는 선두였는데, 지금은 일행 뒷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걸음을 빨리하는데 마을 언덕위 성당 앞에서 일행들이 쉬고 있다. 방금 전까지 쉬고 왔는데 또 쉬기는 뭐해 잠시 앉았다 일어나 먼저 출발한다. 아마도 시간상 다음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 에스테야일것 같다. 얼마만큼 걸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걸을 거리가 대충 얼마였으니 몇시쯤에는 도착하겠구나 하는 감은 몇일째 계속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긴다.
비야투에르타 마을을 나서고 나서도 한동안은 들판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멀리 보이는 얕은 산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 산을 넘어가면 산밑에 마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지친 몸을 이끌고 산을 올라가는데 산밑이 아닌 산등성이에서 마을 입구가 나타난다.
에스테야 마을 입구에는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는데 ‘exceleate agua'라고 글씨가 써있다. 이게 스페인 약수인가? 기대에 부풀어 맛을 보지만 그냥 맹물맛일뿐 별로 특별한 것 같지도 않다. 진짜 좋은 물 맞아?
물마시며 잠시 쉬고 있으니 민호, 용만이, 지영이, 보아, 현정누나가 올라온다. 그래도 젊다고 아버님, 어머니, 소화누님보다는 빨리 온다. 마을 입구에서 어느 알베르게로 갈지 토의를 한다. 에스테야에는 알베르게가 3개가 있다. 한곳은 기부제(Donative)고 한곳은 6유론데 둘다 30명정도로 규모가 작다. 가장 큰 알베르게인 Hospital de Peregrinos de Estella는 104명을 수용하는데 아침을 포함해서 7유로를 내야한다. 9명이라는 인원수 때문에 작은 알베르게는 아무래도 자리가 없을 수 있으니 가장 큰 알베르게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침 포함 7유로면 비싼것도 아니다.
여태까지는 방을 배정해주면 아무 침대나 골라쓰면 됐는데, 여기 알베르게는 선착순으로 침대 번호를 배정해준다. 한방에 20여명이 들어가는데 각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다. 문제는 샤워실이 남녀공용이다보니 한번 남자가 들어가면 줄줄이 남자가 들어가고 여자가 한번 들어가면 계속해서 여성들이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는 씻는것도 줄을 잘서야 한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기 위해 내려가는데 전화기 앞에 동양 여성이 있다. 설마 또 한국인? 말 걸기가 무서워진다. 지금도 9명이라는 대인원인데 또다시 한국인이라면 이 일행이 얼마만큼 커질지 두렵다. 그냥 지나갈려는데 눈이 마주쳐 버렸다. 무의식에 나오는 인사
“안녕하세요”
이미 내 머릿속에는 그냥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냥 툭 튀어나오는 한국말. 그리고 그걸 받아 인사하는 아가씨. 가끔은 틀려도 좋으련만 역시나 한국인이다. 더구나 이 아가씨 혼자가 아니다. 알고보니 일행이 3명. 이들도 각자 다 따로 왔는데 피레네를 넘으면서 동행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보다 하루 빠른 9월 30일에 일정을 시작했는데, 수비리에서 에스테야까지 3일에 오다보니 우리와 만나게 된거였다. 자세히 알게되면 일행이 늘어날 것 같아 별로 묻지도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민호보다는 어린 22살, 23살 아가씨와 정말 동안의 40세 누님이었다는것 뿐. 도대체 이 길 위에 한국인이 얼마나 깔린걸까? 이 아가씨들이 완벽하게 확인사살을 해준다. 우리보다 하루 빠른 일정으로 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9명이나 있다고. 일행들을 버리고 질러가봐야 결국 다른 한국인들을 만날테고, 뒤쳐진다면... 솔직히 뒤에 몇 명이나 한국인이 있는지 모르는게 더 두렵다.
세탁을 하고 식당을 찾아 나섰는데, 식당은 안보이는데 작은 슈퍼가 있다. 알베르게가 주방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요리를 해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문제는 무슨 요리를 해먹냐인데, 예전에 캐나다 여행을 한 경험을 살려서 수제비와 파전을 해먹자고 의견을 냈다. 한국 음식을 해먹고 싶어도 서양에서는 고추장과 된장은 고사하고 고춧가루도 구하기가 어렵다. 채소류도 몇종류 없고, 그렇다면 대충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수제비와 파전이었다. 서양 어디를 가나 해물과 감자, 밀가루는 쉽게 구할 수 있다. 양파와 당근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파도 구할 수 있다. 해물, 감자, 밀가루, 양파로 할 수 있는 요리하면 답은 뻔하지 않은가. 수제비는 간 맞추는게 문제인데, 간을 맞출게 소금뿐이라 쉽지 않고, 파전은 제대로 된 후라이팬이 없어 눌러붙기 때문에 뒤집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하지만 만들면 맛과 모양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배속으로는 들어간다.
쌀에 밀가루에 눈에 보이는 각종 식재료는 다 찾았는데, 문제는 소금이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소금으로 보이는 물건은 안보인다. 용만이가 아무리 ‘솔트’라고 얘기해봐야 주인아저씨는 알아듣지 못한다. 수가 없어 ‘salt'라고 적어보지만 그 또한 통할리 만무하다. 이 상황에서는 손짓 발짓도 의미가 없다. 여하간 대단한 스페인이다. 영어 단어 통하는게 아무것도 없다.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받아두었던 스페인어 사전 앱을 작동시킨다. 프리로 된걸 찾다보니 스페인어를 영어로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유용하다. 찾아보니 소금이 스페인어로는 sal이다. Sal이라고 나오는 화면을 주인아저씨께 보여주자
“쌀”
그러시면서 웃으시고는 소금 봉지를 꺼내와서는 조금 덜어주신다. 같은 발음 다른 의미. 참 묘한 느낌이다.
슈퍼에서 쇼를 해가며 장을 보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주방을 점령한다. 전기밥솥이나 압력솥은 당연히 없다. 냄비로 밥을 해야 하는데 해본 사람은 다들 안다. 냄비밥은 얼마나 힘든지. 안해본 사람이 하면 삼층밥이 되기 십상이다. 요리강습을 하시는 어머니도 냄비밥은 자신없어하신다. 그런데 지영이가 나서서 잘도 냄비밥을 한다. 집이 식당을 하다보니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다. 우리일행 9명에 아까 마주친 한국인 여성 3명까지 가세해서 어머니가 솜씨를 발휘한 수제비를 나눠 먹는다. 동양인 12명이 처음보는 음식을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있으니 지나다니는 외국인들이 신기하게 본다. 어머니는 재료가 제대로 없어 맛이 없을거라고 하시지만 정말 맛있었다. 다들 스페인 시골동네에서 이런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이제 남은건 해물파전이다. 뒤집개가 있어 무난히 만들어질 줄 알았는데 후라이팬이 엉망이다 보니 눌러붙기도 하고 제대로 뒤집어 지지가 않는다. 정말 이런건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파전을 먹으려면 어쩔수 없다. 여자들한테서 후라이팬을 건내받아 후라이팬 째로 던져 파전을 뒤집어 버렸다. 다들 이런 것도 할 줄아냐는 듯한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할 줄 아는게 아니다. 후라이팬으로 파전 뒤집기는 대학에서 과주점을 할때 하루종일 만들어 팔면서 터득하게 됐다. 더구나 일년에 제사 4번, 구정, 추석해서 여섯번씩 10년 동안 전을 붙이다보니 어쩔수 없이 노하우가 생긴다. 그렇게 혹사(?) 당했는데 안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거다.
“제가 이 정도가 되기까지 집에서 얼마나 혹사당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내 푸념에 용만이도 집에서 많이 당했는지 한마디 거든다.
“아들이라 쓰고 머슴이라고 읽지요.”
머슴이라,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딱히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면 지영이는 딸이라 쓰고 하녀라 읽어야 하나. 어째든 원해서 습득한 기술은 아니지만 이때는 유용하게 써먹었다. 계속해서 파전을 만들어 나르지만 내가 만드는 속도보다 파전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식사하러 내려온 앨빈에게도 한판 주고, 옆에서 식사하던 스웨덴 아주머니에게도 한접시 건내주니 다들 맛있게 잘 먹는다.
후라이팬이 제대로 달궈지다보니 만들어 내는 속도도 빨라지고 속까지 제대로 익는다. 노릇하게 제대로 익은 파전을 아가씨들 앞에 내주자 보아와 현정누나 기다렸다는 듯이 놀린다.
“우리에게는 설 익은것 주고는...”
“승호, 너 딱 걸렸어. 너도 남자라고, 젊은 애들이 좋다 이거지...”
오랫동안 봐온 사이 아니랄까봐 손발이 척척 맞는다. 농담을 하셔도 그렇지 아무렴 띠동갑도 넘는 어린 아가씨들에게 수작을 걸까. 그것도 산티아고 길에서. 여기 온 이유 중 하나가 여자 때문인데 내가 뭘 한다고.
“후라이팬이 이제야 달궈진걸 저보고 어떻하라고요”
“너 정색하는게 수상한데...”
남의 심정도 모르고 이 누나 끝까지 날 놀려먹을 심산이다. 진짜 확 도망가 버릴까보다.
식사를 다 마치고도 날이 환하다보니 모두들 알베르게 마당에 나가 술 한잔을 한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호두가 널려있다. 아버님이 칼로 호두를 까는걸 보다 못한 지영이가 나서서는 주변에 있는 벽돌을 들고와서는 한방에 잘도 호두를 박살내 버린다.
“나도 집에서 엄청 당하는데, 누나도 장난 아니다.”
용만이가 놀라워 하자, 지영이가 한마디로 눌러버린다.
“너 농사 지어 봤어? 난 어릴때 이앙기가 아니라 손으로 심어서 농사도 지어봤어”
고생 모르고 곱게 자랐을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몰랐는데 별별걸 다 경험하며 살아왔다. 다들 놀라워한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걸 새삼 느낀다.
호두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가다 누군가가 내일 일정을 물어온다.
“전 내일 리오까지 갑니다.”
난 분명 내 일정이 이렇다고 말한건데, 일행들은 우리로 받아들인다. 내가 어디까지 간다고 말하면 지영이가 책에 나온 지도를 보고 갈림길이 있는지, 중간에 다른 쉴 곳은 있는지, 중간마을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얘기한다. 그리고 나면 보아가 합세해서 알베르게가 몇 개고 시설이 어떻고 토의를 해서는 어디서 묵을지 결정을 한다. 이날부터 산티아고 도착할때까지 이 패턴의 반복이었다.
에스테야에서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까지는 29km다. 지영이나 보아가 가진 책자에는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22km 정도만 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다음날 목적지가 로그로뇨(Logroňo)로 같다는 거다. 내 일정대로 리오를 거치면 내일 29km, 모레는 20km만 걸으면 되지만, 로스 아르코스에서 쉬면 내일 22km, 모레 27km를 걸어야 한다. 로그로뇨는 대도시다보니 순례자들이 다들 쉬어가는 곳이다. 늦게 들어가면 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것 같아서 로그로뇨 들어가는 날 조금 적게 걷는게 좋아 보인다. 그리고 힘이 남아 있어야 도시 구경도 좀 할 수 있을테고
리오까지 가네, 로스 아르코스에서 멈추네 어쩌네 하면서 한참 토의를 한다. 여기 올 때는 다들 각자 왔는데, 이제는 헤어져 따로 떨어지는건 아예 생각도 안한다. 다함께 가는걸 너무나 당연시한다. 과연 이 일행들에게서 헤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