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팜플로냐 Pamploňa -> 푸엔뗴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지영이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새벽 5시 반이다. 어제 저녁 8시부터 잠들었으니 거의 9시간 이상을 잔거다. 이렇게 많이 자는 적이 별로 없는데 삼일동안 걸으면서 피로가 누적되기는 했던것 같다.
어제 산 치즈와 햄으로 엉터리 보카디요를 만든다. 주말동안은 재료 살 곳이 없어 어쩔수 없었지만 어제는 슈퍼마켓을 찾은 이상 재료를 준비해 뒀다. 점심에 먹을것까지 충분하게 준비하고 아침식사를 하다보니 8시가 가까이 돼서야 출발한다.
어제 저녁때부터 부슬비가 내려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나가보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고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지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그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혹시나 비박하게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일반우의 대신에 타프로도 사용가능한 판쵸우의를 사가지고 왔는데 비로 악명높은 갈라시아 지방은 고사하고 산티아고 길 초반부터 개시하게 됐다.
우의를 입으면 열기가 배출이 안되어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최대한 옷을 가볍게 입고 판쵸우의를 입었다. 무지 더울거라 생각했는데 옆에가 터져 있는 판쵸우의 특성 때문에 바람이 통하다 보니 일반 우의랑 달리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다.
팜플로냐 신시가지를 지나 도시 외곽으로 나오는데만 1시간 정도 걸렸다. 멀리 산 위에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저기가 그 악명 높은 페르돈 고개일까? 가보면 알겠지.
비가 와서 페르돈 고개를 올라가는 길은 진창길이다. 조심조심해서 올라가는데 깔딱고개라는 악명에 비해 경사도 심하지 않고 높이도 그렇게 높지 않아 배낭 무게만 아니라면 관악산 올라가는 것보다 쉽다.
고개를 다 올라갈때쯤 그 유명한 순례자들의 모습을 재현한 금속 조형물이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던 조형물을 직접 보니 반가운 마음에 더 빨리 올라간다. 여기가 페르돈 고개구나하며 올라섰는데, 조형물보다 주변 경치가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페르돈 고개 밑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분지. 올라온 쪽은 짙은 회색 구름이 깔려 있는데 내려갈 방향으로 펼쳐진 분지 위에는 하늘이 열리면서 푸른 하늘이 보인다. 말이 안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경치에 스페인에 온 보람을 느끼며 한동안 넋을 놓고 하늘만 쳐다봤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페르돈 고개 올라올 때는 하필 오늘 비가 오고 날씨가 짓궂을까 하늘 원망을 조금은 했는데, 페르돈 고개에 펼쳐진 장관을 보는 순간 이런 멋진 광경을 보여준 하늘에 감사했다.
페르돈 고개에서 사진도 찍고 잠시 쉬고 있으니 용만이 일행이 올라온다.
보통은 출발지에서 크레덴시알을 받지만, 그거 외에 대학교에서 스탬프를 받는 특이한 크레덴시알이 있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동안 5개 지역에서 지역당 1곳 이상, 최소 5개 대학의 스탬프를 받아오면 학위를 주는 크레덴시알이 따로 있다. 인터넷으로 신청해서 사전에 받을 수도 있고, 현지 대학에서 받을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일반 학위와 동급 취급을 해준다나 어쩐다나... 어제 정호씨 말을 들은 용만이 녀석, 어차피 걷는 거, 학교까지 조금만 수고하면 된다고 오늘 팜플로냐 대학으로 크레덴시알을 받으러 되돌아 갔다가 온다고 했는데, 벌써 따라 붙었다. 소화 누님을 기다리며 중간 중간 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진짜 빨리도 왔다. 군 제대한지 얼마 안됐기 때문일까.
페르돈 고개 밑으로 보이는 마을 bar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민호와 먼저 출발한다. 페르돈 고개를 넘어올때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가팔라 천천히 땅을 보며 내려오는데, 어느새 구름이 활짝 걷히고 해가 드러난다. 우의를 벗고 열린 하늘을 실컷 감상하며 걷는다.
이 길을 왜 왔냐고 일행들이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난 하늘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다들 의아해했지만 진짜로 난 하늘이 보고 싶었다.
하늘은 한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푸르기도 하고 파랗기도 하고 하늘은 여러 가지 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항상 변하며 움직이는 구름들을 보면 마치 살아있다고 항변이라도 하는 것 같다. 활짝 펼쳐진 하늘위에 약동하는 구름들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페인의 하늘은 위도가 더 낮기 때문일까, 푸르다 못해 파랗다. 그것도 아주 파랗다. 그러면서도 멀리 보이는 하늘은 엷은 하늘색으로 마치 하늘위에 파란색의 그라데이션이 펼쳐진 것 같다. 가장 좋은 점은 하늘 풍경을 방해하는 고층 건물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의 하늘은 답답하다. 어느 쪽을 봐도 건물과 전기줄로 둘러쌓인 하늘밖에는 안보인다. 마치 삶이라는 올가미에 꽁꽁 묶인 인생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에서 스페인의 하늘은 자유스럽다. 하늘을 보고 걷다보니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인지 모르겠다.
페르돈 고개를 내려와 제일 처음 나온 마을에서 bar를 발견 못했다. bar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된 마을이 bar 표지판도 없다. 카미노 표지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일행들하고 만나기로 했으니 그냥 가버릴수는 없고 어디서 쉬지 하고 주위를 둘러 보니 알베르게가 있고 앞마당에 의자가 보인다. 들어가보니 알베르게 안에 bar가 있다. 이때까지 지낸 알베르게들이 전부 협회에서 운영하는 거다 보니 알베르게는 그냥 숙박시설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에 사로잡혀 사설 알베르게가 많이 bar를 겸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스페인에서 커피는 에소프레소와 비슷한 Cafe Solo와 우유를 많이 넣은 Cafe con leche 그리고 우유가 조금 들어간 Cafe cortado 3가지가 있다. 뭘 시키든 가격은 똑같거나 고작 10-20센트밖에 차이가 안나다보니 무조건 양이 많은 Cafe con leche를 시켜먹는다.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를 시키면 보통은 작은 커피잔에 주는데 간혹가다 유리컵에 한가득 따라주는 곳이 있다. 여기 알베르게가 그랬다.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한데 따뜻한 커피에 아침에 만들어온 보카디요로 점심을 해결하니 배가 든든해진다.
페르돈 고개부터 용만이 일행과 같이 온 소화누님은 아예 어머니와 같이 천천히 걸어가겠다면서 먼저 가라고 한다. 나이도 비슷하고 걷는 속도도 비슷하다 보니 우리보다는 어머니가 더 편한것 같다. 덩달아서 용만이는 알베르게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아버님 어머니를 남겨두고 우리랑 같이 가겠다고 먼저 일어난다. 모두들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게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나만 빼고...
지금까지는 그래도 우리일행 따로, 용만이 일행 따로 걷다가 우연히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되서 어울린건데, 이제는 아예 40대 이상 어르신 일행 따로, 30대 이하 젊은이 일행으로 나눠져 함께 걷는다. 나만 빼고...
난 걸을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혼자 걷는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때는 남들보다 빨라서 혼자 걸었고, 론세스바예스부터는 골반 통증 때문에 남들보다 뒤처지다 보니 떨어져 걷게 된다. 더구나 걸으면서 수시로 하늘 사진을 찍어대다보니 한번 벌어진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페르돈 고개에서는 민호와 먼저 내려왔기에 일행들보다 먼저 마을에 도착했지만, 마을을 같이 떠나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뒤쳐져 민호와 지영이, 용만이가 내 앞에서 걸어간다. 페르돈 고개를 같이 내려오면서 많이 친해졌는지, 용만이가 쉬지않고 지영이에게 얘기를 한다. 민호까지 가세하자 걷는 내내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이제는 완벽하게 ‘우리는 일행’ 이 느낌을 풍겨주는데, 혼자 조용히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던 내 바램은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꿈이 되어 멀어져 가는 것 같다.
페르돈 고개를 내려온 이후로는 계속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사방으로 펼쳐진 들판길을 걷는다. 누런 들판과 초록색의 잔목들, 그리고 하늘에 펼쳐진 하얀 구름과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러다 갑자기 나타나는 마을, 그리고 다시 펼쳐지는 풍경. 그렇게 걷다보니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광장 앞에 있는 교회의 시계가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정도면 레이나에 도착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이정표를 제대로 보지 않고 걸었더니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현지인에게 물어볼려고 해도 지금은 시에스타 시간이라 인적이 없다. 대도시야 관광객들이 있다보니 인적이 끊기지 않지만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마을들은 정말 시골 동네다보니 시에스타 시간에는 완벽한 적막이 흐른다. 어떻게 대낮에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잠자러 들어갈 수 있는지 신기하다. 설마 학교도 시에스타 시간에는 수업을 안하고 잘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똑부러지는 지영이도 여기가 어딘지 확신하지 못한다. 어딘가 마을 이름이 나와있는 간판이라도 있을까 광장 주변을 돌아다니다 공지사항을 붙여놓은 종이에서 마을이름을 발견했다. 레이나 전 마을인 오바노스(Obanos), 레이나까지는 2.7km를 더 가야 한다.
오바노스에서 레이나로 가는 길은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도로를 가로질러 숲으로 연결되고 그러다가 갑자기 알베르게 건물이 나오면서 레이나에 들어서게 된다.
레이나에는 알베르게가 3개 있는데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 Albergue Jakue는 9유로로 가장 비싸다. 당연히 저렴한 곳으로, 오늘의 목표는 5유로짜리 알베르게인 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 마을을 관통하는 주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성당이 나오고 그 성당 앞에 알베르게가 있다.
숙박료를 내는데 순례자는 4유로만 내면 된다고 한다. 괜히 횡재한 느낌이다. 들어가보니 현정씨와 보아씨에 앨빈까지 아는 얼굴들이 많이 있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가 없는줄 알고 찬물에 손빨래를 했는데, 세탁을 다하고나서야 주방쪽 다른 방에 세탁기가 있는걸 알았다. 카미노 앱에 알베르게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지까지 정보가 나오는데 스페인어다보니 모르고 있었다. 이날 알았다. Lavadero가 세탁장, Labadora가 세탁기, Secadora가 건조기라는 것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딱 그 꼴이다.
수비리에서 앨빈이 도와준것이 너무나 고마웠다며 어머니가 식사대접을 하고 싶어하신다. 모두가 앨빈을 알다보니 자연스럽게 다같이 식사하러 식당을 찾아 나선다. 민호, 지영이, 소화누님, 아버님, 어머니, 용만이, 현정씨. 보아씨, 앨빈에 나까지 10명이 레이나 길을 걸어가는데 식당이 안보인다. 한블럭을 더 지나가서야 조그만 식당을 발견했는데 10명이나 되다보니 안쪽에 자리가 없어 야외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여기서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머니께서 오는 중간에 식당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못 봤는데 식당이 있었나?
식당이 2개다보니 선택을 해야하는데 다들 미루는 눈치다. 이럴 때는 시간을 끌어봐야 어차피 결론은 안난다.
“앨빈보고 1이나 2중에서 선택하라고 하죠. 1이면 어머니가 봤다는 식당, 2면 그냥 여기. 어때요?”
오늘은 앨빈에게 식사 대접하는게 주목적이니 앨빈보고 정하라고 하면 된다. 어차피 앨빈은 한국어를 모르니 어느 식당이 1번인지 2번인지 모른다. 원래 뭐가 뭔지 모를 때 선택이 쉬운 법이다. 앨빈에게 선택을 해보라고 하니, 이 친구 동전을 꺼내들더니 한쪽면씩 one, two라고 정하더니 동전을 던진다. 결과는 1. 지나쳐온 식당이 당첨되서 우루루 다시 되돌아 갔다. 그런데 되돌아가보니 어머니가 보셨다는 식당은 그냥 빵가게였다. 어머니 설마 앨빈에게 빵만 잔뜩 먹이실 생각이셨던가요?
결국 식당은 아까 본 그 곳 하나뿐이다. 좀 더 돌아다니면 다른 곳을 찾을지 모르지만 다들 지쳐서 더 돌아다닐 생각을 안한다. 다시 우루루 원래 식당으로 되돌아와서 야외테이블 3개를 붙여서 둘러 앉는다. 식사가 되는 시간까지는 조금 기다려야해서 음료를 먼저 시켜놓으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가는데 우연히 나이 얘기가 나왔다. 보아씨가 34살, 자신을 38살이라고 밝히는 현정씨. 보아씨도 30초반으로 봤지만 특이나 현정씨는 나와 동갑이거나 조금 어릴거라고 봤는데 누나라고...믿기지가 않는다. 워낙 여자들에게 잘 속는 편이라 이번에도 현정씨가 나한테 장난을 치는줄 알았다. 누나 소리 들어볼려고...
“못 믿겠어요. 민증 까봐요”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됐을 것을, 괜히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해가지고는.
“내가 이 나이에 나이 속여 뭐하겠니”
그러면서 내미는 주민등록증. 분명한 73년생. 확실하게 누나 동생으로 서열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현정누나가 나한테 장난치기 시작한 것이. 스스로 무덤 잘도 팠다.
안주가 발전한 타파스는 식사로도 손색이 없는데, 문제는 기본이 술안주다보니 음식 자체가 대부분 차갑다는 거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6가지 타파스 요리를 받았는데 역시나 전부 차가운 음식이다. 날이 저물어 추운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음식을 먹고 있으니 소화불량이나 안걸릴지 걱정이 된다.
3일 연속으로 같이 저녁 먹고 술마시고 했더니, 다들 너무 친해져 다같이 가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아침에는 4명이던 일행이 점심에는 7명이 되고 저녁에는 9명으로 늘어나 버렸다. 어떻게 일행이 점점 늘어만 가는지, 이러다가는 산티아고 도착할 때는 100명정도 대부대가 되버리는건 아닐지 걱정이다.
내일은 에스테야(Gares-Estella)까지 22km 정도를 가야한다. 에스테야에서 2km 정도만 더가면 이라체 수도원이 있다. 이 사람들과 계속 같이 가야 하나? 확 질러서 이라체 수도원까지 가버려... 고민이 된다. 같이 있으면 좋긴 하지만 내 자신을 돌아볼려고 온 원래 계획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모든건 결국 순리대로 흘러가겠지. 그냥 가는데로 놔두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하루가 또 흘러간다.
[출처] 길을 잃고 길 위에 서다 (10월 4일 팜플로냐->레이나) (카미노) |작성자 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