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수요일
트리아카스텔라 (Triacastela) -> 사리아 (Sarria) 18km
점점 더 잠이 없어진다. 눈을 떠보니 12시도 되지 않았다. 옆에 스페인 부부는 얌전히 잘 잔다. 여자분이 새록새록 미약한 숨소리를 낼뿐 뒤척이지도 않는다. 내 잠을 방해할 소음도 없는데 왜 깼을까? 몸이 근질근질거린다. 실제로 배드벅이 있는 걸까? 아니면 현정누나 등 다른 사람들이 물린 것 때문에 예민해진 걸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만 떨어져 있다는 낯설음 때문일까?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이제 산티아고 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한 6~7일정도만 더 걸으면 끝나겠구나.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나나 싶던 길이 이제는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어떤 면에서는 아쉬워진다. 일행들과 어울릴 시간도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구나.
머리도 복잡하고 잠도 안와서 결국 뒤척이다가 4시에 슬그머니 짐을 싸서 나와 버렸다. 최소 5~6시까지는 자고 싶었는데 바램은 바램으로 끝났다. 알베르게 휴게실에 앉아 어두운 밤풍경을 바라다 본다. 창이 숲쪽으로 나 있기에 창밖은 불빛 하나 없는 완벽한 어둠이다. 차분히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만 하다.
7시가 되니 사람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지영이는 6시부터 깨있었는데 나오기 뭐해 그냥 있었다고 하고, 현정누나는 너무 더워서 깨어 있다가 4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내가 일어날때 누나는 들어가 잤다는 건데, 만약에 그때 만났다면 새벽부터 수다 삼매경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옆에 사람 침대 때리고 싶었어요”
같은 방에서 잔 여자가 코를 얼마나 심하게 골던지, 보아는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보아 입에서 때리고 싶다는 말이 나오다니 놀랍네. 그런 사람이 아무리 약기운에 취해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어제 오 세브레이로에서는 기차화통 같은 소음 속에서 잠을 잤는지 신기하다.
“오빠, 세탁실 어디에요?”
보아가 어제 세탁하면서 잃어버린 양말 한짝을 여전히 못 찾았다며 세탁실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다. 가봐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짐을 다 챙겨서 나가는데 다른 외국 여성분이 양말을 보았다며 아침에 세탁실에 가져다 놨다고 알려준다. 보아와 세탁실을 확인한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그 사이에 가져다 놓은 건가?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보아는 양말을 찾았다는 소리에 기뻐하면 세탁실로 갔다오더니 뾰루퉁한 얼굴로 그런다.
“똥개 훈련 시키는 거야 뭐야”
역시 양말은 없었던 거다. 누군가가 버렸거나 가져갔으리라. 오늘 보아 입에서 나오지 않을것 같은 말을 여럿 듣는다. 보아가 화도 내기는 하는구나.
“지 갈 길 간 거죠”
그러면서 깨끗하게 단념한다. 이미 없어진 물건 잊는게 상책이지. 우울한 기분 금방 털어내고 다시 환한 얼굴로 돌아오는게 보아답다고 할까, 밝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문을 연 bar에서 커피와 빵으로 대충 아침을 해결한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죠?”
오 세브레이로 이후 일정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제는 어디까지 갈지 내가 물어보고 있다.
“지영이하고 넌 우리팀을 이끄는 쌍두마찬데 네가 그러면 어떠하냐”
“말했잖아요. 오 세브레이로에서 멈춘 다음부터는 난 모른다고”
“그래도 그렇지, 너 너무 손 놔 버리는거 아냐”
어제부터 내가 다음 일정에 너무 관심이 없다고 현정누나가 타박한다. 그래도 확실하게 합시다. 난 팀을 이끈적 없어요, 일행들이 알아서 따라왔을 뿐. 이제는 나도 편하게 그냥 따라가겠다는 것 뿐입니다.
이제 다음 일정을 아는 건 지영이 뿐이다. 오늘 목적지 사리아(Sarria)로 가는 길은 고개를 넘어가는 20km 코스와 경사도는 약하지만 26km를 가야 하는 조금 긴 코스 둘로 나뉜다고 지영이가 설명을 해주자, 소화누님과 어머니는 무조건 단거리를 외치며 먼저 출발하신다. 아버님은 볼만한 수도원 건물이 있다는 말에 장거리 코스를 원하시지만 구라 세자매는 단거리 코스를 원한다. 용만이는 어느쪽도 상관없다는 주의고, 나도 별 상관 없지만 오른쪽 무릎 때문에 가능한 경사가 급하지 않는 길을 가고 싶기는 하다.
우선 출발은 했지만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힘들지만 조금 걷는쪽이냐, 멀기는 하지만 멋진 수도원 건물도 있는 편한 길이냐. 결정하기가 힘들다.
“동전 던져서 결정해요. 알았죠?”
용만이가 보다못해 동전던지기로 결정하잖다. 위로 올라갔다 바닥에 떨어지는 동전. 결과는 긴 코스다. 하지만 구라 세자매는 가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한다. 이럴거면 동전은 왜 던진거냐고...
“동전던지기 다시 할께요. 무조건 운에 맡기고, 반역자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저녁 사기에요”
내가 동전을 받아 다시 던진다. 이번에는 단거리 코스 당첨. 구라 세자매는 좋다며 바로 걷기 시작한다. 다시 하자는 말 꺼내지도 말라는 무언의 표시. 우리가 동전 던지는 사이 민호는 어머니 뒤를 따라 단거리 코스로 도망쳐 벌써 저 멀리 가고 있다.
단거리 코스로 발을 돌리기는 했지만 아버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수도원 건물이 보고 많이 보고 싶은신데 혼자서 가기는 뭐하고 어쩔수 없이 따라오시는 듯 보인다. 사실 나도 수도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릎이 안좋아 경사도가 약하다는 저쪽 길로 가고 싶기도 하다.
“우리 복불복 해요. 한사람만 뽑아서 수도원 건물 사진 찍어오기”
내가 제안을 하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만,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좋아요. 그럼 2명 가기. 나머지 4사람이 둘한테 저녁 사주기로 하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다른 거 낸 두사람이 가서 인증샷을 찍어오고 나머지 4사람은 저녁사주기로 하니 다들 머뭇거리다가 동참한다. 보아는 너무나 가기 싫다는 것이 얼굴 표정에 드러난다. ‘걸리면 안되는데’ 그러는데, 솔직히 난 보아와 둘이 걸려 갔으면 싶다. 보아와 단 둘이 가게 되면 행복한 시간, 여자 둘만 걸려서 보내면 나름대로 복불복 장난이 성공이니 즐거운 시간이 될거다. 최악의 경우는 아버님이나 용만이와 같이 걸려 남자끼리 가는 경우인데 설마 그렇게 재수 없지는 않겠지.
구라 세자매와 아버님, 용만이, 나 이렇게 6명이서 복불복 가위바위보를 한다. 하지만 다른거 내는 두사람으로 정해놓다보니 잘 되지 않는다. 아버님이 이건 안된다며 그만 하자고 하자 용만이가 마지막 5판만 해서 안나오면 포기하고 가자며 막판 5번을 외친다. 그리고나서 세 번째에서 승부가 났다. 걸린 사람은 ....... 나와 용만이. 이게 뭐냐고.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용만이냐고.
“가자”
더 이상 긴 말은 필요없다. 승부는 승부. 결과는 이미 나왔는데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바로 뒤돌아서 장거리 코스로 걸어가니 아버님이 따라오신다. 어지간히 수도원 건물이 보고 싶으셨나보다. 결국 구라 세자매는 단거리 코스로, 용만이와 아버님, 나 이렇게 남자들만 긴 코스로 나눠졌다.
“형한테는 이 길이 괜찮을거에요. 경사도 그림으로 볼 때 한 2~3도 정도 경사니까, 평지길이라고 보면 될거에요. 저쪽은 완전 심하던데요.”
용만이가 거리는 길지만 평지 비슷할거라며 말하는데, 어떻게 된 길이 가도 가도 평지는 없고 계속 오르막 내리막이다. 이게 평지길이면 저쪽은 무슨 암벽등반이라도 한단 말인가? 긴 거리를 짧게 축소해서 경사를 표현하다보니 오르락 내리락 경사 변화가 반복되는 구간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직선처럼 보이는데 그걸 평지길이라고 생각한 거였다. 용만이가 축척의 개념이 약하다는걸 이때 알았어야 하는 건데 나중에 산티아고 가서 한번 더 당했다.
도로를 따라가는데 사리아까지 20.5km라는 표지가 나온다. 지영이가 26km 거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걸까? 첫 번째 마을을 지나면서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도로를 따라가면 20km, 산길로 가면 26km. 확, 도로를 따라 걸어버려. 문제는 인증샷을 찍어가야 한다는 것. 도로를 따라 남자끼리 걷고 있으려니 흥이 안났는데 산길로 접어들면서 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양 옆으로 큰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 있는 오솔길을 계속 걷고 있으려니 나무로 된 굴을 지나는 것 같다. 싱그러운 풀내음에 신선한 공기하며 지금까지 걸어왔던 산티아고 길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다. 지금와 생각하지만 갈라시아 지방에서 가장 다시 걷고 싶은 길을 꼽으라면 난 이 구간을 주저 없이 뽑겠다. 그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길이다.
경치에 취한것도 있지만, 나무로 둘러 쌓인 오솔길이다보니 거리감이 생기지 않는다. 얼마만큼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수도원을 통과한다는 것만 알았지, 몇 km에 있는지 마을 이름이 뭔지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왔기에 그냥 걷기만 한다.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뭐.
고개를 하나 넘어서 내려가는데 길 오른쪽 언덕 밑으로 수도원 건물이 나타난다. 수도원 건물답게 산속에 지어졌는데 그 크기가 상당하다. 언덕에서 인증샷을 한방 박아주시고 내려갔더니 수도원 건물만 있는줄 알았던 곳에 큰 마을이 붙어 있다. 언덕 위에서는 나무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bar에서 맥주 한잔씩 하고 다시 출발하니 거의 정오가 다 되어간다. 다음 마을에서 식사하면 되겠구나. 마을을 나오면서 수도원이 있는 이곳이 사모스(Samos)라는걸 알았다. 사리아까지는 11km라고 도로 표지가 보인다. 중간에 식사하고 쉰다고 해도 3시 정도에는 떨어지겠구나 싶었는데 길이 도로에서 산쪽 고갯길로 연결되더니 계속 오르막 내리막, 2시간이 넘도록 쉴 수 있는 bar는 보이지도 않는다.
2시가 넘어 도착한 마을에서 bar를 발견하고는 무조건 들어간다. 배가 고픈데 먹을거라고는 슈퍼에서 파는 비닐포장된 것들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냥 아무거나 사서 나오는데 앞에 많이 본 배낭을 맨 순례자가 가고 있다. 그런데 옷이 등산복이 아니라 청바지다.
“설마 정호형?”
“에이, 아닐거에요. 정호형은 폰페라다에서 대학 스탬프 받는다고 하루 더 머물렀어요. 우리하고 하루 차이가 나는데”
그랬었지. 그런데 어째 정호씨처럼 보인단 말이야.
“정호형”
그냥 불러봤다. 어차피 외국인들은 한국어 알아듣지도 못할테니 무슨 상관이랴 싶어서. 그런데 바로 반응해서 뒤돌아보는 순례자. 정호씨다. 폰페라다 이후에 하루에 30여 km 씩 걸어서 왔다나, 우리가 20km 정도씩만 걸었으니 따라잡힌거다. 참, 이 분하고도 인연이 질기다. 걷다보면 계속 만나게 되니. 정호씨는 언제나처럼 빠르게 걸어가 버린다.
“우리가 저쪽보다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있을까?”
“보아 누님이 백덤블링하고 다른 사람들이 문워커 추면서 가면 가능해요”
내 질문에 대한 용만이 대답이 가관이다. 그런데 왜 하필 보아가 백덤블링?
“백덤블링 포스는 차라리 지영씨 아닌가?”
“형, 몰랐어요. 보아 누나 원래 무용과잖아요”
무슨 소리지? 원래 무용 전공인데 도중에 간호학으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용만이가 설명을 해준다. 그랬구나. 지금의 간호사 보아도 너무나 잘 어울리지만, 춤추는 보아도 왠지 보기 좋을 것 같다.
“누가 그러더라. 35세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한계 나이라고. 그 때를 지나면 생각이 굳어져 근본적으로 바뀌기 힘들다나. 그래서 만 35세가 될 때 여길 온 거야. 추석도 보내고, 생일도 지나고 그리고 온거지.”
용만이와 얘기하다가 하필 이시기에 오게 됐는지 얘기를 하게 됐다. 용만이야 제대하는 날 비행기를 탔으니 본인이 결정한게 아니지만, 난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시기를 택했다.
“형 생일이 언젠데요?”
“9월 OO일”
내 생일을 말하자 용만이가 화들짝 놀란다.
“진짜에요?”
생일 속이는 사람도 있나? 왜이래.
“형, 저도 생일이 9월 OO일이에요. 와, 나랑 생일 똑같은 사람 처음 봐요.”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어떻게 생일이 똑같을수가 있지. 용만이하고 정확하게 10년 차이로 생일이 똑같다니.
“그래서, 형하고 내가 잘 맞았구나.”
용만이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혈액형도 똑같고, 생일도 같고, 확실히 용만이하고는 죽이 잘 맞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카냐(생맥주)의 길도 같이 해 온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이 일행들을 만나게 질긴 인연이 아니라 운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용만이와 얘기하며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사리아에 들어섰다. 알베르게 위치를 몰라 정호씨를 계속 따라갔는데 앞에서 갑자기 등산용품과 선물을 파는 가게로 들어간다.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고 화살표 표시를 따라 언덕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간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갔는데 만약에 알베르게가 밑에 있는거라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계단을 다 올라갔더니 계단 위 언덕에 자리한 bar에 전에 몇 번 본 한국인 여성이 있다. 그분에게 알베르게를 물으니 바로 아래에 있는 건물을 가르키신다. 잘못오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알베르게에 가보니 우리일행은 다 도착해 있다. 아무리 경사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거리상 6km나 더 걸어야하니 도착 시간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3시 반에 도착했는데 구라 세자매는 거의 1시 반에 도착했다고 한다.
용만이와 내가 생일이 같다는 말에 다들 생일을 말해보는데.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 양력 생일과 지영이 음력 생일이 똑같고, 민호와 현정누나는 호적에 올라있는 생일이 같았다. 생일까지 미묘하게 같은 일행들. 이렇게 억지로 모으라고 해도 모으기 힘들텐데,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길에서 만나 동행이 되다니 이게 인연일까 운명일까?
짐정리를 하고 식당도 찾을 겸 슈퍼로 장을 보러 간다. 가는 길에 들린 약국에서 배드벅 스프레이를 사면서 알게된 진실. 그동안 빈대 못오게 한다고 뿌린 약이 빈대용이 아니라 이잡는 약이었다. 아스토르가에서 잘못된 약을 준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뿌려대고 있었으니 빈대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보아의 황당해 하는 표정이 장난이 아니다. 나 같으면 짜쯩 왕창 날것 같은데, 그냥 잠시 어이없어만 하고 만다. 보아가 나보다 마음이 넓은가보다. 이 약국에서 빈대 및 모기용으로 준 약은 몸에 뿌려도 되는거다. 이런걸 놔두고 그 고생을 했으니 모두 허탈해한다.
중국인 상점을 발견하고는 양말 등 간단하게 쇼핑 좀 해주시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발견한 맛있어 보이는 파이. 역시 여자들이란. 그런데 구라 세자매보다 용만이가 더 광분해서 제과점을 구경한다. 무서운 놈. 결국 맛을 봐야 한다며 도넛과 파이 조각을 샀다. 저녁도 안먹겠다면서 파이는 맛을 봐야 한다니 여자들 식성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알베르게에 장본것을 가져다 놓고 아버님과 저녁을 먹기 위해 나온다. 다들 저녁 생각은 없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저녁을 사주기 위해 구라 세자매와 식당을 찾아 도시를 헤맨다. 오늘 먹은 것이라고는 빵쪼가리 달랑 2개. 아사하기 직전이다. 난 그냥 배불리만 먹고 싶은 마음뿐인데, 용만이는 bar가 아니라 제대로 된 주방장이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고 레스토랑을 찾아가자고 한다. 다들 아무 생각없이 동의했는데, 문제는 이 넓은 도시에서 레스토랑이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도시를 빙빙 돌아보지만 레스토랑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현지인에게 좋은 식당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도시 중심가가 아니라 외곽쪽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식당이 중심가가 아니라 외곽에 있다? 뭔가 이상하지만 친절히 설명해줬는데 잘못 알려준 건 아닌거 같아 가보니 작은 호텔안에 레스토랑이 있다.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데. 다른데 가자”
기껏 힘들여 물어물어 왔건만, 현정누나는 분위기가 안좋다며 다른데로 가자고 한다. 동생에게 좋은데서 맛있는걸 사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되지만, 누나 난 배고프다고요.
누나가 들어오는 길에 레스토랑을 봤었다고 그리 가자고 하며 앞장을 서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온 길은 내일 나갈 방향이다. 누나가 방향을 착각하는 바람에 결국 헤매다가 찾아 들어간 곳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피자집이다. 더 이상 식당 찾을 여력도 없어 최소한 배는 채울수 있겠구나 하는 심정에 말없이 따라간다.
구라 세자매가 먹겠다고 시킨 과일 샐러드가 나오자 현정누나가 한마디 한다.
“이거 딱 술집 과일 안주네. 여자들도 나오는거야?”
농담을 해도 언제나 19금을 유지해 주는데 역시 현정누나 답다. 샐러드는 과일안주 같고, 용만이가 시킨 해물피자는 해물들이 제각각 따로 놀고, 그나마 내가 시킨 세트 메뉴가 먹어줄만 했는데, 아이들이 먹는거라 그런지 양이 후덜덜하게 많이 나온다.
돌아오는 길에 빨리 가기 위해 올 때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접어들었는데 언덕 꼭대기에서 예쁜 성당 건물을 발견하고는 구경을 간다. 스탬프가 놓여 있길래 한번 찍어봤는데 너무나 이쁘다며 다들 크레덴시알 가져와서 찍겠다며 알베르게로 뛰어간다. 크레덴시알을 가지고 다시 성당으로 와보니 아까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봉사자 한분이 스탬프를 들고 찍어주신다. 그런데 아까 내가 찍었던 스탬프가 아니다. 다른 문양에 보아가 이거 말고 다른걸 찍어달라고 하니 안된다고 하신다. 스탬프도 사용 용도가 다른건가? 보아가 계속 저걸 가리키자 안된다고 하시던 분이 ‘될대로 되라’ 심정인지 모두에게 찍어주신다. 여정 막바지가 되니 크레덴시알에 빈공간이 많이 남아 다들 스탬프 찍기에 열중이다.
나는 직접 찍어서인지 성당 스탬프가 선명하고 이쁘게 잘 나왔다. 하지만 다른사람들은 봉사자가 막 찍어주다보니 흐릿해서 내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거 찢어 줘요”
보아가 내게 이쁘다며 크레덴시알을 찢어 달라고 한다. 농담인줄 알지만 보아야, 그게 말이 되니. 말도 안된다고 응수하면서도 이거 찢어줄 수도 있나 속으로 고민을 한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거 찢어서 나줘”
“나주면 안돼요”
현정누나와 용만이까지 가세해서 달라고 장난을 친다. 구라 세자매야 예전부터 나가지고 장난이었지만, 이제는 용만이까지 은근히 합심해서 장난질이다. 이 일행들에게 나란 존재는 놀림감의 대상인가.
새벽부터 잠 설치고, 복불복 외치다가 내가 당하고, 평지길인줄 알고 갔는데 오르막 내리막의 경사길이었고, 맛있는 저녁 얻어먹겠다고 찾아 헤매다가 결국 얘들 먹는 피자집 들어가 이상한 피자나 먹고, 오늘은 뭔가 자꾸 어긋나는 피곤한 하루였다. 멋진 경치를 구경한거 하나가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내일은 23km만 가면 되니 오늘은 푹 쉬고 싶다. 제발 중간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잘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