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수비리->팜플로냐
새벽 4시. 결국 잠이 깼다. 옆 침대 외국인은 이갈고, 코골고, 밑에 외국인은 수시로 발버둥을 친다. 덩치도 꽤 되는 분이 발버둥을 치니 침대 이층에서 느껴지는 요동이 장난이 아니다. 이건 침대에 누워있는게 아니라 그네나 놀이 기구에 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6시간이나 잠을 잤다는게 용하다. 잠을 깬 김에 인터넷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 키보드는 우리나라와 자판 배열이 다르다. 컴퓨터 셋팅을 고쳐 한글 자판을 쓸 수 있게 해보려 하지만 설정창으로 못들어가게 제한이 되어 있다. 결국 엉터리 영어로 집에 메일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오니 지영이와 소화누님이 일어난다. 결국 5시도 되기 전에 출발준비를 시작하게 됐다.
소화 누님이 가져온 라면 스프와 지영이가 가져온 건조된 쌀을 넣고 끓인 꿀꿀이 죽에 어제 먹다 남은 바케트 빵, 그리고 민호가 무식하게 짊어지고 온 참치캔으로 대충 아침을 먹는다. 아무리 태양이 강렬한 스페인이라지만 새벽은 역시나 추운데, 그나마 따뜻한 라면 국물이 들어가니 살 것 같다. 음식을 해먹는다고 시간을 조금 지체하기는 했지만 알베르게를 떠날 때 보니 아직 7시도 안된 새벽이라 밖은 여명 조차 밝아오지 않은 깜깜한 어둠이다.
헤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어제 수리비를 들어올때 건너온 다리를 다시 건너 나라소냐 방향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팜플로냐까지 갈 계획이다. 약 20km 정도니 거리도 적당하고 큰 도시다 보니 볼거리도 있어서 거의 모든 카미노 책자는 팜플로냐에서 멈추게 일정을 짜고 있다.
어두운 숲길을 한참 걷다보니 동이 트면서 나라소냐가 나온다. 나라소냐도 수비리처럼 산티아고 길에서 벗어나 있어 마을 구경을 할려면 다리를 건너 넘어갔다 와야 한다. 소화누님도, 지영이도, 민호도 걷기에 바빠 마을 구경은 별 관심이 없고, 나야 골반 통증이 여전해서 나라소냐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고 곧장 팜플로냐로 향해 버렸다.
수비리에서 나라소냐까지는 그래도 완만한 평지길이었는데 나라소냐를 지나면서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되더니 한동안 산등성이를 타고 가다가 다시 숲길로 이어진다. 도로로 나왔다 싶으면 다시 숲길로, 마을에 들어섰다 싶으면 마을을 나가면서 다시 숲으로, 어째 오늘은 숲속만 주구장창 지나 다닌다. 계속 숲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결국 소화누님은 힘드시다며 먼저 가라고 뒤처지신다. 지영이야 지리산에서 단련된 몸이라 쉬지도 않고 잘 걷고, 민호는 젊기 때문일까 발바닥에 물집도 잡힌 녀석이 잘도 따라온다.
아레(Trinidad de Arre)로 가는 산길에서 거꾸로 걸어오는 한국 아가씨를 만났다. 산티아고 길을 다 걷고 무언가 허전해서 바로셀로나 관광을 포기하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팜플로냐에서 생장피드포르까지만 거꾸로 걸어보고 있다고 한다. 하다하다 이제는 되돌아오는 사람도 한국인. 정말 한국인이 많이 왔구나 싶은데 그 아가씨 종지부를 찍어주신다. 이 길 위에 한국인이 쫙 깔렸다고. 올해만 200명이 넘게 왔다나.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아 산티아고 길을 선택한 내가 우스워진다.
산티아고 길을 끝내고도 길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가씨를 보자 많은 생각이 든다. 과연 나도 산티아고 길을 끝냈을 때 저런 허전함이, 무언가 빈듯한 공허함이 마음에 남게 될까? 끝까지 가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민호 녀석은 그 아가씨를 보고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죠. 이 길 걸어도 살은 안빠지나 봐요”
민호 말에 웃음이 터진다.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나면 살 좀 빠지지 않을까 나름 기대를 했는데 통통한 아가씨 몸을 보고 나니 그쪽으로 걱정이 됐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그걸 말로 내뱉어 버리다니. 민호 녀석 막내라더니 진짜 귀엽다. 몸은 짐승인 녀석이...
내가 읽었던 산티아고 여행기 중에서 한분은 마을이 너무나 이뻐서 일부러 아레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일행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아레에서 멈춰버릴까 솔직히 고민을 했다. 지영이야 워낙 잘 걷고 자기 앞가름이 확실해서 걱정이 안되지만 소화누님과 민호는 물가에 내논 어린아이 같아 걱정이 된다. 지영이에게 떠넘기고 헤어지려니 마음에 걸려, 아레에서 멈출것인가 아니면 팜플로냐까지 가버릴것인가 결정을 못 내린 상태에서 아레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타났다.
고풍스런 다리를 건너자마자 정호씨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게 보인다.
“신발 벗고 누워있었더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묻잖아. 그래서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쉬고 있다”
정호씨가 웃으며 푸념한다.
순례자들끼리는 뭔지 모를 동지애 같은게 있다. 한달 이상을 걸어야 하니 발 상태에 다들 민감해지는데, 누군가 앉아서 발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괜찮은지 물어온다. 발상태가 심한 경우에는 의약품 같은 것도 나눠주고... 분명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길인데 문제는 쉴려고 누워있는데도, 뻗어버린게 아닌가 걱정이 돼서 신경을 써주다 보니 편히 쉴 수가 없다는 거다. 군대도 아닌데 쉴려고 안보이는 곳에 짱박힐수도 없고 묘하게 웃기다.
아레에 들어서니 무슨 행사 같은 것을 한다. 큰 인형을 사람들이 들고서 행진을 하는데 일요일이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는지 사람이 상당히 많다. 책으로 읽을 때는 고풍스런 중세 유럽 마을을 기대했는데 내 기대와는 많이 다르게 근대식 건물들이다. 아레에서 팜플로냐까지는 약 4km 정도 거리가 된다고 앱 정보에 나와 있어서 마을이 끝나고 다시 숲이나 들판이 펼쳐질줄 알았는데 계속 건물들만 보인다. 알고보니 달랑 2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레와 팜플로냐 외곽이 맞닿아 있다. 단지 팜플로냐 외곽 지역에서 알베르게가 있는 구시가까지가 4km라는 거. 스페인의 대학도시라더니 팜플로냐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여차하면 아레에서 멈춰버려야지 생각했었는데 이게 뭔지...
이미 점심때가 지난 시간. 일요일이라 지나오는 마을에서 사 먹을 곳도 없었다. 더 가든 안가든 축제때문인지 상점들이 문을 연 이곳에서배는 채워야 한다. 읽었던 여행기에서는 아레에서 저렴하고 괜찮은 제과점을 찾았었다고 해서, 나도모르게 제과점을 찾아 두리번 거리지만 스페인 간판이 익숙하지 않다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거의 마을 끝으로 나갈 즈음에야 제과점을 하나 발견했다. 빈속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장시간 걸었더니 아무것도 안들어간 바게트 빵이 잘도 배속으로 들어간다.
제과점 앞 길가에서 빵을 뜯으며 한참을 뒤쳐진 소화누님을 기다리는데 아레 입구에서 쉬고 있던 정호씨가 온다. 혹시나 축제 인파 때문에 못오고 있는건 아닌지 싶어 소화누님을 봤는지 물어보니 못 봤다고 한다. 길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정호씨는 걱정하는데 왠지 그냥 천천히 오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화누님이 길을 잃었는지 아닌지 가지고 우리 내기할래요. 맥주 내기”
그냥 기다리자니 심심해서 장난끼가 발동한다.
“난 길은 잃지 않았고 발이 아파서 그냥 천천히 오고 있다”
내 말에 정호씨는 길을 잃어버렸다에 건다.
“이 시간까지 안오셨으면, 길을 잃고 헤매서 다른곳에 갔다오느라 늦는게 아닐까”
내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가 나는법. 민호와 지영이까지 합류시켰다.
“언니가 길을 잃지는 않았을것 같아요. 안 잃었다에 한표”
“저도 누님이 길을 잃었을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일행은 모두 안잃었다에 걸고, 정호씨 혼자 길을 잃고 헤메다 오고 있다에 걸었다. 소화누님이 길을 잃고 헤매서 늦는거라면 정호씨가 술을 안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호씨에게 음료를 3번 사고, 그게 아니고 그냥 단순히 걷는게 느려서 늦는거라면 정호씨가 우리에게 맥주를 사기로 내기 성립. 그런데 소화누님이 와야 내기가 결판이 날텐데 너무 늦으신다. 사람을 찾겠다고 다 흩어져버리면 더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민호 혼자만 아레 입구까지만 되돌아 가보기로 한다. 축제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민호를 보면 한참을 기다려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안돼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난다. 여행경비가 빠뜻하다던 녀석이, 더구나 소화누님을 찾으러 갔으면서 느긋하게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났다면.... 역시나 뒤에 소화누님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따라오는게 보인다.
“어차피 늦은거,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정신차리고 가야지하고 있는데 민호가 갑자기 나타나는거야”
소화누님은 오자마자 쉴새없이 뒤쳐져 혼자서 온 얘기를 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한건 한가지...
“누님, 혹시 오다가 길 잃고 헤메신적 있으세요?”
내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신다.
“길은 안헤맸는데...내가 워낙 천천히 걷잖아, 더구나 발이 아파서 오래 쉬었더니...”
자초지정을 설명하시는데, 어차피 더 이상의 설명은 귀에 안들어온다. 앗싸! 공짜 아이스크림에 공짜 맥주까지. 오전에는 쫄쫄 굶었는데 오후되니 먹을 복이 터진다.
아레와 팜플로냐가 달랑 2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기에 그냥 조금만 더 가면 될줄 알았다. 빵으로 배도 채웠겠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먹었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팜플로냐에 들어섰는데 가도가도 구시가가 안보인다. 신시가지를 잠시 가로지르고는 교외로 돌아가게끔 화살표가 되어 있다. 조금만 걸으면 될줄 알았던 길이 거의 1시간 이상을 걸어서야 구시가가 있는 시타델을 볼 수 있었다. 시타델 앞 공원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자 바로 앞에 벤치가 보인다. 우습게 보고 걸었다가 팜플로냐 도시를 1시간 이상 돌아왔더니 너무 힘들어 벤치를 보자마자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배낭을 내려놓고 앉으려고 하는데 근처에 있던 현지인 아저씨가 다가와 이것저것 알려줄려고 계속 말을 건낸다. 협회 알베르게는 시타델 안쪽에 있고 사설 알베르게는 시타델 바깥쪽에 있다는 것까지는 대충 몸짓으로 알아듣겠는데 그 이상은 뭔 말인지 알수가 없다. 솔직히 쉬고만 싶은데, 이 아저씨 너무 친절하시다. 계속 반복해서 설명하시는데 짜증을 낼수도 없고, 열심히 설명하는 아저씨를 앉아서 쳐다볼수도 없어 얼굴에 어거지 웃음을 띄고 서서 계속 들어준다. 이해못한다고 하면 계속해서 설명해주실 기세다. 환하게 웃으며 대충 알아들은척 하며 배낭을 메고 도망쳐 버렸다. 쉴려고 했는데 스페인어만 주구장창 들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 현기증이 난다. 뒤돌아보니 그 아저씨 또 다른 순례자를 붙잡고 뭐라고 하고 계신다.
과하게 친절한 아저씨 한테서 도망쳐 건널목을 건너가니 시타델 앞에 벤치가 또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하고는 널부러져 버렸다. 목 좀 추기며 다시 뒤쳐진 소화누님을 기다리는데, 소화누님이 왠 서양 아저씨와 건널목을 건너오며 얘기를 하는게 보인다. 소화누님이 영어 좀 하시나 했는데 다가오자마자
“승호씨, 영어 좀 해요? 이분이 뭐라고 하시는데 못 알아듣겠어요”
나한테 떠넘기신다. 민호도 있고 지영이도 있는데 왜 하필 나냐고. 나보고 어쩌라고...
“Can you speak english?"
소화누님이 나한테 말하는걸 본 그 외국분이 묻는다. 영어를 하긴 뭘 해.
“little"
정말 솔직하게 손으로 조금이라는 제스처를 취해가며 말했는데, 이 분 그걸로도 만족하시는지 영어로 설명을 시작하신다. 에구구 쉴려고만 하면 외국인이 붙으니 이게 뭐다냐.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한 아저씨(?)는 중년정도 나이인줄 알았는데 정년퇴임하신 네덜란드 역사 선생님이셨다. 16~17C 쯤 시타델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필로포(뭐 그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남의 나라 왕 이름 내가 알게 뭐람) 2세가 네델란드계 인물이라나... 시타델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하신다. 직업은 못 속인다더니... 그나마 내 영어가 짧았기에 할아버지 선생님도 간단하게만 설명을 하고는 시타델로 올라가신다. 휴. 이럴때는 영어 잘 못하는게 천만다행이다. 용만이처럼 원어민 수준이었다면 강의 한번 제대로 들을 뻔 했다.
소화누님도 오셨으니 알베르게를 찾아 시타델로 들어간다. 구시가로 들어가는 시타델 입구는 시타델 성벽을 빙 돌아서 올라가야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인지 카미노 표지 외에 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인 Albergue de Jesus y Maria 표지판이 따로 있다. 노파심에서, 스페인어에서 J는 'ㅎ'으로 발음한다. ‘헤수스 이 마리아’ 알베르게는 카리노 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표지를 따라 조금 윗길로 올라가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협회에서 운영하는 공용 알베르게라 그저 그럴줄 알았는데 시설이 제법 괜찮다. 2층 침대 2개씩 따로 나눠져 있어 불을 따로 켜고 끌 수 있는 등 4명인 우리에게는 딱 좋은 숙소였다. 몇일 지내다보니 알아서 자리가 정해진다. 위로 올라가기 힘들다고 소화누님이 밑에 자리를 잡으니 자연스럽게 그 위는 지영이가, 난 배드벅 피한다고 위쪽을 고집하니 민호는 자동으로 내 밑에 자리를 잡는다.
샤워를 하고 세탁을 하러 세탁실로 가보니 세탁기 2대 건조기 2대가 있다. 분명 1유로라고 되어 있고 동전 투입구도 있는데 세탁기를 작동시키니 그냥 작동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수 없지만 공짜로 된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세제만 있으면 된다. 한국인이 좀 많은가. 알베르게를 돌아다니며 물었더니 마침 정호씨가 가지고 온 것이 있다. 돈도 안넣고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뭐 나중에 돈 달라면 주면 되겠지. 아니면 말고.
팜플로냐는 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와 사설 알베르게가 있는데, 협회에서 운영하는 Jesus y maria 가 114명 수용으로 크기도 크지만 시설이 잘 되어 있다보니 다들 이곳에서 묵는다. 생장피드포르부터 몇일 동안 봐왔던 얼굴들이 거의 다 있다. 당연히 한국인들도 전부다.
일요일이라서 팜플로냐 들어오기 전까지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했다. 어차피 먹으러 나갈거 여기서 또 만났으니 같이 식사하러 가기로 한다. 우리 일행 4명, 용만이 일행 3명, 간호사 아가씨 현정씨와 보아씨. 어제 수리비에서 뭉치고 오늘 팜플로냐에서 또다시 뭉쳐 다니고 있다. 낯선 스페인 도시 한복판에 한국인 9명이 몰려다니며 식당을 찾아다닌다. 부슬비가 조금씩 내려 알베르게 근처에서 대충 해결하려고 하는데 시간이 이렇게 이른줄 몰랐다. 다들 피곤하다고 눈도 좀 붙이고 나왔는데도 아직 6시도 안된 시각, 8시는 되야 식사가 가능하다. 그나마 순례자 메뉴를 파는 곳은 7시부터 식사가 가능한 곳도 있는데 알베르게 근처에 그런 식당을 못찾았다. 기다리기에는 허기도 심하고 부실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밖에서 기다릴수도 없다.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어 각자 알아서 자기 먹을 걸 사가지고 가서 같이 먹기로 한다. 어제와 같이 이것저것 늘어놓다보니 이번에도 푸짐하게 한상이 차려진다. 어제보다 더 푸짐하게. 알베르게 주방 시설이 괜찮다보니, 샐러드도 만들고, 라면도 끓이고, 맥주에 와인에 나름의 만찬을 즐긴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일정에 대한 얘기가 오간다. 용만이는 짐을 줄이기 위해 카미노 관련 책을 스캔해서 조그만 컴퓨터에 넣어 왔는데 컴퓨터 전원이 안켜져 정보가 없다보니 생장피드포르에서 나눠준 일정표에 의지하고 있다. 내가 가진 앱정보에 따른 일정을 생장피드포르에서 나눠준 일정표에 표시해 드렸더니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하루에 20km는 좀 적고 30km는 무리가 가고 25km 가 딱 좋은것 같은데, 승호씨 일정표가 괜찮네. 용만아, 이대로 갈까?”
“전 상관없어요.”
잠깐, 이게 뭔 소리여.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이런 일정도 가능하다고 정보를 드린건데, 일행과 어떻게 떨어질까 고민하는 인간을 따라 붙어 오겠다니. 혹 떼려다 혹 붙인거...이 비유는 부적합하고, 음...스스로 발에 족쇄를 채웠다는 느낌이랄까 내 무덤 내가 팠다. 혼자 있을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술이 오가다보니 대화가 깊어진다. 용만이가 이런 저런 인생 고민에 대해 늘어놓는다. 내 고민도 해결 못해서 여길 왔는데 과연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대화가 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진다. 결국 외국인 한분이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서 저녁 만찬은 끝이 났다.
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떠나온 길인데 걸을 때는 걷다보니 멍해져 아무생각이 안들고, 숙소에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멍하게 있다 잠이 든다.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싶은데 잠은 떠나갈 기미가 없다. 언제쯤 제대로 된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될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