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수요일
레온(Leon) ->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 25km
어차피 이곳 알베르게는 일찍 일어나봐야 나가 있을 곳이 없다. 아침은 7시에 주고, 문도 7시에 열리니 6시 반까지 자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오늘도 역시나 배드벅 때문에 2시가 되기 전에 깨버렸다. 그리고 시작된 코골이의 향연. 한명이 그만두면 다른 사람이 바턴을 이어받는 릴레이 코골이. 왕 짜증의 연속이다. 음악을 들으며 비몽사몽 밤을 새운다. 6시 반이 넘자 자원봉사자가 들어와 불을 켠다. 아침으로 준비된 빵은 식당에 조금 늦게 갔더니 이미 동이 났고, 주전자 2개에 커피와 우유가 데워져 있어 카페 콘 레체를 만들어 몸을 녹인다.
레온에서 버스타고 이동할거라고 했던 소화누님과 어머니는 레온부터는 버스를 타면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 안해준다는 민호말에 결국 같이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일정을 계산하시더니 여유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딱 맞춰서 산티아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산티아고 전 100km 지점부터가 꼭 걸어야 하는 구간 아니었나. 그렇다면 레온부터가 아닐텐데. 나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가능하면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게 더 좋을테니까. 아니면 헤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숨기려는 걸까.
식사후 바로 출발. 레온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아무 생각 없이 앞에 가는 순례자를 따라갔더니 다들 표지를 잃어버렸다. 앞서가던 순례자도, 뒤에 오던 순례자도 모두다 표지를 잃고 헤맨다. 모를 때는 물어보는게 상책. 지나가는 행인에게 산티아고 길이 어딘지 방향을 묻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알려준다. 그쪽이면 돌아가는건데, 맞나?
“승호씨, 한번만 더 물어보지”
어머님이 한번 더 물어보고 길을 제대로 확인하고 가자고 의견을 내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람을 붙잡고 다시 물으니 산 마르코스 뭐라고 얘기를 하며 방향을 알려주는데 아까 그분하고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처음 사람 말을 믿고 갔다가는 낭패 볼 뻔 했다. 모르면 모르다고 할 것이지 왜 엉뚱한 방향을 알려주는건지. 한 블록 정도 더 걸어가자 표지판이 나오는데 도로명이 산 마르코스다. 그렇다면 이쪽이 맞다는 건데, 경찰 제복이 보여 확인을 위해 다시 물으니 확실하게 방향을 알려준다. 설마 경찰이 잘못 알려주겠어. 몇 번을 물어물어 결국은 산 마르코스 도로 끝에 있는 광장에서 화살표를 발견했다. 그동안 우리 뒤를 따라오던 순례자들도 화살표를 보자 웃으며 앞서 가기 시작한다.
레온 신시가를 지나 외곽의 언덕을 넘어 도로를 따라 걷는다. 처음으로 보인 bar에 들어가 쉴려고 했는데 무슨 골초 아지트인지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널려있고, 잔뜩배어있는 담배냄새가 너무 심하다. 결국 나와서 조금 더 간 곳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간다.
아침에 떠날때까지 말이 없다가 여기서 다시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25km를 오늘 걷고 내일은 아스토르가까지 23km를 걸어 힘을 좀 비축해서 모레에 폰세바돈까지 25km 산악길을 걸을 계획이다. 그런데 구라 세자매는 다른 길을 이용해서 비야르 데 마사리훼(villar de Mazarife) 마을까지 23km를 오늘 걷고, 내일 아스토르가까지 오겠다고 한다. 그러면 내일 27~8km를 걸어야 할텐데, 모레 산으로 올라갈 때 무리가 따를거라고해도, 지영이 발 때문에 오늘은 적게 걸어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쪽 길이 더 아름답다고 책에 적혀 있다나. 내가 갈려고 하는 길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가야 하는 길이니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
길이 다르면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쉴 만큼 쉬었기에 일행들보다 먼저 출발한다. 갈림길에 도착하기 전에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가셨던 아버님을 만나서 가는 길이 나뉘어졌다고 알려드리자, 아버님은 용만이를 기다렸다가 용만이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신다. 잘하면 오늘 진짜 혼자 가겠구나 생각이 들어 아버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로 향한다.
길을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누가 따라오지는 않는가해서. 하지만 아무도 안보인다. 일행은 고사하고 순례자들도 없다. 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다보니 많은 순례자들이 구라 세자매처럼 우회길을 더 선호하는가보다. 아무도 안보이니 혼자 가게 내버려뒀다는 것에 서운함 마음도 들고, 이렇게 혼자가 돼서 원래 목적했던 여행을 하게 됐구나 싶기도 하고, 시원섭섭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뭔가 묘한 감정이 든다. 은근히 신경쓰이는 누군가를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니까 한편으로는 안심도 된다. 비울려고 온 길에서 쓸데없는 번민만 더 생기고 있으니 이렇게 원 상태로 돌아가는것이 차라리 잘됐다 싶다.
혼자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이 조금 이상해진다. 오른쪽 넷째발가락이 삔것처럼 가끔씩 저려온다. 순간적으로 오는 짜릿한 전기충격에 걷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왜이러지? 아리랑 가사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누가 나를 저주라도 하나? 한다면, 누굴까? 왠지 현정누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전기 충격같은 고통은 미치고 환장하겠다.
Valverde de La Virgen 마을 벤치에 앉아 발상태를 점검한다. 손으로 만져봤을 때는 통증도 없고 멀쩡한데 왜 걸을때만 아파오는지 이상하다. 벤치에서 발을 주무르고 있는데 멀리서 용만이가 오는게 보인다. 구라 세자매를 따라갔을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지...
“다들 저쪽길로 가는데 민호씨가 그러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이 저는 그리워 할거라고... 그 말 듣고 그냥 갈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가다가 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반가움 감정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도 누군가가 곁에 있구나 하는 아쉬움 감정이 교차한다. 솔직하게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이제는 나도 헛갈리고 모르겠다. 결국 나와 용만이, 아버님만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로 가고, 다른 일행들은 다른 길로 안녕이다. 여성들은 다 다른 길로 가는구나. 그래도 민호가 저쪽팀에 있으니 무슨 일은 없겠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로 가는 길은 계속 도로 옆을 따라 걷기 때문에 정말 볼 거라고는 없다. 몇몇 마을을 지나치기는 하지만 마을도 구경할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날이 너무 좋아서 강렬한 햇볕은 내리꽂히고, 그러면서 바람은 죽어라 불어주신다. 걷기에는 안좋은 날이다보니 많이 지친다. 더구나 발은 계속적으로 짜릿짜릿한 고통으로 걷다 멈추다를 반복하게 해주시고... 이런 상태에서 3시 전에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에 들어선게 용하다.
협회에서 하는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갔는데 관리인이 없고 순례자만 한명 홀로 있다. 5시에 오픈이라니 그때 관린인이 올거라고 한다. 문이 열려있어 안에 들어가보니 마치 수용소 시설 같고, ‘여기는 완벽한 빈대소굴입니다’라는 공지문만 있으면 딱 맞을것 같은 분위기다.
마을에 오기전 본 간판광고를 믿고 산타 안나(Albergue Santa Ana) 알베르게로 가본다. 깨끗한 침실이 마음에 들어 묵기로 결정했더니 광고에는 3유로라고 되어있었는데 4유로를 받는다. 뭐냐? 허위광고였단 말인가. 왠지 속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미 깨끗한 침대를 봤기에 협회 알베르게로 돌아갈 마음은 안 생긴다. 샤워를 하는데 물이 잘 안 빠져 샤워를 끝냈을때는 바닥이 홍수다. 이거 시설이 왜 다 이래? 설마 침대도 보기에만 멀쩡하고 안으로는 빈대 아지트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싼게 비지떡이라더니, 왠지 겉모습에 속은 느낌이다.
세탁비는 4유로. 그냥 손빨래하고 말지 무지 비싸다. 음식을 해먹을려고 주방 시설이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온건데, 주방 시설을 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전기렌즈가 있는데 그 위에 설치되어 있는 동전투입기. 뭐냐 이것은? 25센트에 8분동안 전기가 들어온다. 사설 알베르게 치고는 숙박료가 싸다 했더니, 다른쪽으로 왕창 끍어내겠다는 심산인가. 주인 아주머니가 너무 돈독이 오른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저녁으로 용만이가 스파게티를 만든다. 미리 재료 손질 다 해놓고 빠르게 조리할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후에 동전투입, 시간과의 싸움이다. 스파게티다 보니 면이 익는데 시간이 걸린다. 처음 시작할때는 어떻게 8분안에 끝내보자고 했지만, 결국 면을 다 익히기 위해서 1유로를 쓰고 말았다. 괜히 손해본것 같은 이 기분. 다음부터는 주방시설부터 확인하고 들어가리라. 면에 비해 소스는 부족하고, 들어간 재료도 버섯, 햄, 양파, 치즈 등 뭔가 부조화스럽지만 그래도 식욕이 반찬이라고 맛있게 다 먹어 깨끗하게 비워버린다.
보아와 현정누나의 방역활동이 없다는 것도 아쉽고, 어머니의 맛있는 밥도 생각나고, 다들 그립기는 하지만, 남자 셋만 있으니 어떤면에서는 더 자유롭고 좋은 것도 같다.
“남자들만 있으니 여성들 눈치 안봐도 되고 좋은데요”
아버님이 옷을 다 벗으시면서 말씀하신다. 잘 때 속옷바람으로 주무시는데, 여성분들 때문에 매일 침낭안에서 옷을 벗고 입으시느라 불편하셨다고 한다. 여기는 남자들만 방을 쓰다보니 눈치볼 사람도 없고 편하다.
내일 점심에 먹을 참치샌드위치까지 만들고 그랬는데도 시간은 고작 7시 반이다. 이제부터 자면 새벽에 일어날게 뻔한데도 너무나 피곤하다. 어제 하루 레온에서 조금 쉬었다고 긴장이 풀린것일까. 오늘은 평지길로만 줄곧 걸었고, 그리 많이 걸은것 같지도 않은데 피로감은 평소보다 더 크다. 아마도 저린 발로 걷다 멈추다를 반복한 때문인것 같다. 진짜 내일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 하나. 혼자 다른길로 떠나갔다고 날 저주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