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특별한 길이겠지만 제가 경험한 카미노는 아마도 그 누구보다 특별 아니 특이합니다.
각기 혼자 떠나온 사람들이 일행이 되어 첫날부터 마지막 산티아고까지 32일을 쭉 걸었습니다.
한두명도 아닌 자그만치 9명이서...
알면 알수록 특이한 인연의 끈.
그 느낌을 잊지 않을려고, 이 인연의 소중함을 잃지 않으려고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냥 혼자만 보다보면 중도에 정리하는 것을 포기할것 같아서 까페에 글을 남깁니다.
처음 쓰는 글이다보니 어색하고 두서없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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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2010년 9월 29일 아침 8시. 티켓팅을 끝내고 탑승게이트 앞에 왔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두근거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얼마만이던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아침 10시 비행기. 2시간 전까지는 티켓팅을 끝내야하니 최소한 7시 반까지는 공항에 가야 한다.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1시간 정도 걸리니 6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어차피 평소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던 시간이라 졸립거나 피곤한 느낌은 없다. 어제 싼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아침을 먹는다. 이제 앞으로 40여일은 한식 구경을 못한다는 생각에 아침밥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6시에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아무래도 출근 시간의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싱가폴항공 티켓팅을 아시아나에서 대행해 주고 있다는 공항 로비에 걸린 게시물을 믿고 아시아나 창구에서 줄을 길게 늘어서서 티켓팅을 기다렸는데, 이런 싱가폴 항공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란다. 아시아나 직원이 알려준 곳으로 가봤더니 싱가폴 항공 창구는 한산하다. 시간도 없는데 엉터리 정보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다. 스페인에서 도로 표지가 잘못되서 헤맬수 있다더니 떠나기도 전부터 이런다. 액땜이라고 좋게 생각하며 나름의 위안을 한다. 어쨓든 비행기 타는데 지장은 없잖아.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 천년을 넘게 이어온 치유의 길. 여러 명칭이 있지만 내겐 치유의 길이라는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완전히 어긋나버린 인생.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결국 내 선택의 결과이니 내 탓이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과 동떨어진 인생길이 되어버린 지금 내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자괴감. 불쑥 불쑥 이렇게 시간을 흘러보내는 것과 죽는 거이 차이가 있을까 하는 우울증까지. 자살의 유혹을 느낄 정도니 내 마음은 모두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누나가 산 책이 눈에 들어왔다.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내게 성 야고보가 묻혀있다는 기독교의 3대 성지 산티아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 단지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서 체력이라면 부실 그 자체인 내가 그 길을 끝까지 걸었을 때 앞으로 남은 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그래 나도 하면 할 수가 있구나. 걷다보니 끝에 도달하는구나. 인생도 살다보면 살아지겠구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 아니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아니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해도 그 길을 다 걷는다면 내 자신을 스스로가 조금은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꼬여버린 인생이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구나 하는 자기 위안. 앞으로 헤쳐나갈 조금의 용기가 내겐 절실했고, 그걸 찾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산티아고 길이었다.
남들은 내가 스페인을 간다고 하니 놀러가는 줄 안다. 걸으러 간다고 하면 국내에도 길이 많은데 뭐하러 그 먼 이국으로 가냐며 이상한 놈으로 본다. 심지어 부모님도 왜 내가 거길 가는지, 여행이라면서 왜 걷고자 하는지 진정한 이유를 모른다. 만약 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카미노는 그렇게 길을 잃고 어둠속에서 방황할 때 나 자신을 찾아 시작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그 중에서 우리 나라에 가장 많이 소개된 것은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해서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는 프랑스길이다. 총 길이 775km. 내가 프랑스 길을 선택한 것은 길이도 길고, 숙박시설인 알베르게가 가장 많은 길이라 쉬고 싶을때 아무 곳에서나 쉴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프랑스 길의 시작점 생장피드포르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2가지다.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바용역에서 갈아타서 생장피드포르역까지 기차로 가는 방법과 바로셀로나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 국내에서 바로셀로나로 가는 비행편보다 파리로 가는 비행편이 압도적으로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파리에서 기차로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누나에게 예매를 부탁했더니 이왕 가는거 싱가폴 구경도 하라며 싱가폴에서 9시간 대기를 해야 하는 비행편을 끊어놨다. Stop Over로 그냥 나가서 구경할수 있다나 뭐라나. 관광이 목적이 아닌 사람한테 관광을 하라고 하니 참 이게 뭐하는 짓인지...
6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 시각으로 오후 2시경 싱가폴에 도착했다. 밖의 날씨는 33℃. 9시간을 공항에서 죽치고 있을수는 없으니 공항 밖으로 나왔다. 비행기표와 여권을 보여주니 아무런 제재없이 그냥 스탬프를 찍어준다.
싱가폴 시내로 들어가려면 우리나라 지하철 같은 MRT를 타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10달러 짜리만 환전해 왔는데, MRT 발권 기기는 지폐 넣은데가 없어 보인다. 나뿐만 아니라 동남아인이나 서양 사람 구분없이 외국인들은 다들 고액 지폐를 들고 헤매고 있다. 아무래도 소액권이 나을 것 같아 역무원에게 돈을 바꿔달라고 하니 2달러 3장과 동전 네 개를 준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지하철을 타는 줄 알고 표 값을 제하고 잔돈을 준줄 알았다. 그런데 동전을 확인해보니 동전이 1달러 짜리다. 이런 멍청이. 같은 달러라는 단위를 쓰니 미국 달러처럼 1달러짜리도 지폐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으니 사람의 선입견이라는 것이 이처럼 무섭다.
씨티홀까지 2.90$. 나중에 표를 반납하면 1$를 돌려주니, 실제 비용은 1.9$, 우리 나라 돈으로 1800원 정도니 교통비가 싼 것은 아닌것 같다.
공항에서 씨티홀 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앉아 있었다. 지하철이 한 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왜 여기서 내리지. 영문도 모르고 있는데 다른 방향에서 온 열차가 도착하니 그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우르르 탄다. 어째 이상한 느낌에 우선 내리고 봤다. 그랬더니 씨티홀행 열차가 들어온다. 하마터면 다시 공항으로 직행할 뻔 했다. 열차가 계속 정차해 있길래 뭐지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대충 내린 것이 어떻게 잘 맞아 떨어진거다. 인천공항에서 헤매면서 액땜한 것이 효과가 있는 걸까.
씨티홀 역에서 내려 싱가폴 리버를 따라 한바퀴 시내를 둘러 보았다. 그러다 Merlion Park 앞에서 보게된 커피 빈. 한국이 아닌 이국에서 친숙한 상표를 보니 너무 반가운 마음에 커피 한잔을 하러 들어갔다. 카푸치노가 5.1$로 한국과 가격 차이가 거의 없다.
지폐 한 장을 내고 아까 MRT 살 때 생긴 잔돈 10cent를 건냈는데 카운터 아가씨의 얼굴이 이상하다. 다시 보니 지갑에 당연히 10$짜리만 있는줄 알고 그냥 한 장 건낸것이 아까 바꾼 2$짜리 지폐였다. 이런, 오늘은 실수 투성이다.
차 한잔을 하며 잠시 쉰 후에 싱가폴 시내를 계속 걸어다녔다. 산이 없다는것. 에스컬레이터가 무지 빠르다는 것, 그리고 가끔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는 것을 빼면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과 차이가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같은 동양 사람이다 보니 이질감도 없다. 친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그런 곳. 내게 싱가폴은 그냥 그런 곳이었다.
배도 안고프고, 머리는 아프고 (가끔 괴롭히는 편두통이 또 시작이다), 약국은 안보이고, 그냥 공항으로 왔다. 공항에는 약국이 있겠지 하고...
공항 입구에서 편의점 내에 있는 약국을 찾았는데 약사가 없다. 다른 점원 말로는 아이가 어떻다는데 내 짧은 영어로는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고, 여하간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다른 약국을 물어보니 T1 또는 T3 터미널로 가란다. (MRT에서 연결된 터미널은 T2다) 내 표를 보니 T3에서 탑승이라 그냥 T3에 왔는데, 여기서는 T2로 가라고 한다. 이게 뭔 똥개 훈련도 아니고... T2쪽 약국에는 점원이 없다고 어렵게 이해시키니 입국장 안으로 들어가면 약국이 있을거라고 알려준다. 결국 입국장 안에 들어와서 어렵게 약국을 찾아 진통제를 샀다. 약국 찾아 3만리도 아니고 에고고...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하는데 어떻게 짐은 자꾸 늘어만 가는 걸까.
집에 전화를 해볼까 하고 시도해 보지만 계속 통화중이다.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면 진짜 통화중인걸까? 머리가 지끈거려 그냥 포기하고 앉아버렸다. 뒤죽 박죽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고 있다. 진통제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파리까지 13시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진통제를 두 알이나 먹었는데 별로 차도가 없다. 머리가 지근거리니 밥 생각도 안나고 탑승 위치 B4 gate 앞에 앉아있는데 미칠것만 같다. 저녁 7시. 10시 40분 비행기이니 앞으로 3시간도 더 남았다. 누웠으면 좋겠는데 눕자니 눈치가 보인다. 누울까 말까 갈등하는데 건너편에 서양 노인 한분이 길게 누워서 주무시는게 보인다. 그래 까짓것! 얼굴에 철판 깔고 걍 누워버렸다. 벤치에 누운거지만 앉아 있는 것에 비할 소냐. 완전히 잠들면 소매치기 당할까 걱정이 돼서 선잠을 잤다. 중간 중간 깰때마다 주변을 보니 누워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최초 시작이 문제지, 누군가 한 명이 시작하면 금방 전염되어 버린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두 시간쯤 선잠을 잤더니 두퉁이 사라졌다. 가끔은 얼굴에 철판을 깔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들이 안한다고 나도 따라 안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가 중요할뿐. 사소한 것에서 하나씩 배우고 깨닫게 되는것. 그게 여행의 참묘미가 아닐까?
파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검색대를 지나 탑승 gate앞으로 가서 앉아있는데 초록색 여권이 눈에 들어온다. 설마 한국 사람? 유심히 살펴보니 한국사람이 맞는데 복장이 특이하다. 등산복 바지에 등산화. 설마 이 분도 산티아고.... 아닐거야 하면서도 한가닥 그럴지 모른다는 느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실례지만 한국분이시죠?”
내 말에 뒤로 돌아본다.
“네”
“복장이 특이해서 그러는데 혹시 산티아고 가세요?”
“네”
너무나 간단하게 날라온 대답. 허걱!
알고보니 이분 O정호씨는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다. 난 누나가 일부러 stop over를 하라고 대기시간 긴 비행기편을 알아본거지만 정호씨는 갑작스레 표를 구하다보니 이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찌됐던 정호씨는 나와 똑같은 코스로 산티아고로 가는 중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파리 몽빠르나스 역에서 내가 12시 10분 기차로 생장피드포르에 가는 반면 그는 10시 10분 기차라는 점 정도.
산티아고 길에 30대 남성은 거의 없다는데, 더구나 비수기에 접어든 지금, 시작도 하기 전에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내가 이해할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곳. 철처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고독을 곱씹으며 차분히 내 자신을 돌아보며 40여일을 걸어가려던 내 계획에 금이 가는 징조였다. 그때는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