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10월 9일 토요일
나헤라(Najera)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to. Domingo de la Calzada) 21km
산티아고 길을 걸은지도 벌써 9일째다. 다시 토요일 주말. 걷다보니 시간이 가는지도 요일이 변하는지도 모르고 지낸다.
어제는 초저녁부터 한분이 코를 엄청 골아서 잠을 잘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의외로 5시까지 푹 잤다. 백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방을 같이 쓰는거라 부스럭거리기 뭐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낭 안에 누워있는데 다른 외국인들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덩달아 일어나 얼른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온다.
아침에 먹을 스프를 만드는데 도마가 없다. 냄비 올려놓는 나무판을 도마 대용으로 칼질을 하는데 칼도 시원찮다. 어떻게 식칼 하나 없는지... 대충 양파와 피망을 썰고 스프를 푼다. 물이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너무 멀겋고 우리나라 스프와 달리 걸쭉해 지지 않는다. 어차피 속만 채우면 되는 걸. 현정 누나가 만든 샌드위치에 스프를 찍어 대충 배를 채운다.
아침을 만들어 먹느라 지체되기는 했지만 7시가 조금 넘어 길을 나선다. 오늘도 발은 정상이 아니다. 왼쪽 발목은 여전히 안좋고 오른쪽 발은 새끼발가락에 이어 엄지까지 물집이 잡혔다. 조그맣기는 해도 신경이 쓰이는건 어쩔수 없다. 빨리 걷는 것도 무리지만 발 상태를 생각해 일부러 천천히 걷다보니 출발하자마자 꼴찌로 뒤쳐진다. 날은 잔뜩 흐려있고 순례자들은 나를 추월해 빠르게 지나간다. 생장피드포르에세 피레네 산맥을 넘을때는 내가 모두 앞질러 갔는데 오늘은 반대다. 발이 안좋은지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는 할아버지 한분과 터벅터벅 느리게 걸어간다. 가끔은 이렇게 느리게 걷는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행의 후미도 보이지 않을 무렵 마을이 나타난다. 아소프라(Azofra) 마을을 가로질러 내려가는데 멀리 bar 앞에 민호가 보인다. 다들 bar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있다. 이제는 익숙해져일까 아침에 먹는 카페 콘 레체 맛이 좋다.
아소프라 마을을 벗어나는데 구름색이 시꺼멓게 변해가는게 느낌이 안좋다. 벤치가 보여 배낭을 내려놓고 우의를 챙겨 입자 비가 오기 시작한다. 부슬부슬 오는 빗길을 터벅터벅 걸어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간다. 시간상 저 언덕을 넘으면 멀리 마을 모습이 보일거라 생각했는데 언덕을 오르자마자 마을이 나타난다. 아소프라 다음에 산토 도밍고까지는 중간에 마을이 없는줄 알았는데 다른 마을이 있었다.
언덕 위 돌로 된 의자에서 쉬면서 우의를 벗었다. 구름이 하얗게 변해가서 비가 안올줄 알았는데, 바람이 뒤쪽에 있는 먹구름을 끌고 온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다시 오는 비. 젖을 수는 없으니 우의를 다시 꺼내 입는다. 우의를 계속 입고 있으면 땀이 나서 괴롭고 비가 멈출때마다 벗자니 귀찮다. 오늘도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피곤하게 생겼다. 오늘 걸을 거리는 22km 정도로 적당한 편인데 발이 안좋아서일까 아니면 비때문일까 어제 30km 걷는것과 느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씨루에냐(Cirueňa) 마을을 지나면 벌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쭉 뻗은 길이 나오고, 멀리 지평선 끝트머리에 솟아 있는 언덕이 보인다. 언덕을 넘으니 내리막 이후 다시 오르막으로 언덕의 연속이다. 길이 안보이면 생각을 안할텐데 거의 직선 길이라 언덕 정상에 오를 때마다 멀리 까지 보인다. 마을은 안보이고 걸어가야할 길만 주구장창 뻗어있으니 정신적으로 피로해진다. 저 멀리 다시 언덕이 나타난다. 이제는 마을이 보일 때가 된 것 같은데, 저길 올라가면 산토 도밍고가 보일까. 올라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멀리 도시가 보인다. 이제는 산티아고 길에 적응한걸까 아니면 걷는 거리에 감이 생긴 것일까. 대충 이쯤이겠지 하면 마을이 나타난다. 언덕에서 볼때는 그래도 가까워 보이던 길이 직접 내려가니 상당히 멀다. 씨루에냐에서 산토도밍고까지 6km라고 하는데 느낌은 10km이상 걸은것 같이 피곤하다.
산토 도밍고까지 내려온 후에도 마을을 상당히 가로지른 후에야 구시가지에 있는 알베르게가 나온다. 알베르게 안에 들어가 수속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앨빈이 이미 벌써 체크인을 하고 먹을 것을 사가지고 들어온다. 유스케도 그렇지만 앨빈 이친구도 무지 빠르다. 언제나 우리보다 늦게 출발하는데 도착은 먼저 해 있다. 양말을 벗어보니 이제는 왼발 중지에도 물집이 잡혀있다. 걸음걸이가 비정상이 되다보니 조금씩 이상이 생긴다. 이런 몸으로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갈수 있을지 걱정된다.
여기 알베르게도 주방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다. 토요일이라 상점이 다 문을 닫아 식재료 살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구시가로 들어오는 길에 큰 마트가 있었다고 해서 다같이 장을 보러 간다. 비가 조금씩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하는 우중충한 날이다. 각자 필요한 것을 따로 사고 다같이 먹을 저녁거리를 사는데 여자가 5명이다보니 이것저것 조금씩 챙겼는데도 한가득 짐이 되버린다.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사는 양을 보면 이걸 다 어떻게 먹나 걱정이 될 정도다.
오늘의 메뉴는 파스타. 어제 사 놓고 먹지 않은 치즈까지 곁들여 넣으니 아주 이국적인 맛이 난다. 스페인 친구들이 밥을 많이 했다고 주는데 우리 음식만으로도 배가 불러 결국 손도 못돼보고 남기고 말았다. 성의가 있는데 조금 미안하다. 밥에 소금간을 하고 뭘 넣었다고 하는데 민호가 한 입 먹더니 너무 짜다고 못먹겠다고 한다. 밥하는 방법도 이국적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와는 확실히 틀리다.
어머니 덕분에 매일 저녁 푸짐하게 잘 먹고 있고, 일행들과 어울려 즐겁긴 하지만 끝까지 같이 가야 하나 솔직히 고민은 된다. 나름의 이유로 먼길을 왔는데,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더구나 너무 빨리 걷고 있다. 천천히 걷겠다고 다짐하고 일정도 40일 정도로 여유롭게 잡고 왔는데 걷다보면 생각이 사라지고 멍해지다보니 평소 걸음걸이가 나와버려 빨라진다.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왔는데 버린다고 버려질까 싶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게 인생이라더니 여행도 내 뜻대로만은 할 수 없나 보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까지 다 했는데도 아직 6시가 안됐다. 성당 갈 시간이 될 때까지 심심했는지 민호가 휴게실에서 체스를 보더니 같이 둘 상대를 찾는다. 정말 간만에 두는 체스. 전체 길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뭐든지 오래 안하면 낯설어지는 법이다. 사람도 같은 것이겠지. 그러니 눈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라 했겠지. 좋아했던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거라 자기 위안을 하며 마음을 접는다. 버릴려고 온길 아니던가. 욕심은 욕심일 뿐 이제는 내려놓을 때도 됐거만 뜻대로 잘 안된다.
체스에도 사람 성향이 그대로 들어나는 걸까 아니면 민호가 서툰 것일까? 선수를 두고도 방어일변도 안전을 추구하는게 눈에 보인다. 가끔은 과감하게 손해도 보면서 버릴건 버리고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 하나 버리지 못하는게 뻔히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인생도 똑같은데 왜 전체 상황이 눈에 안 보이는 걸까. 그렇다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텐데. 아마도 먼 훗날 세상과 안녕 할때쯤이면 보이지 않을까. 아 그때 이렇게 했었다면 하면서 웃을수 있을까. 정말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