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0월 30일

*고니* 2013. 3. 11. 13:56

 10월 30일 토요일

팔라스 데 레이 (Palas de Rei) -> 아르수아(Arzua) 29km

 새벽에 잠을 깨자마자 신발부터 확인한다. 역시 예상대로 마르지 않고 축축하다. 화장실 휴지로 물기를 몇 번이나 빨아내고 스팀 옆에 두지만 앞으로 길어야 2시간 정도 시간밖에는 없다. 마르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어쩔수 없는건 어쩔수 없는거고 6시까지 더 잘려고 하는데 5시가 되자 어금없이 지영이가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결국 침낭속에서 뒤척이다 따라 일어나 버렸다.

 

 흙탕물에 젖어있던 신발을 다시 신는 건 한마디로 느낌이 더럽다. 신자마자 양말을 타고 전해지는 축축한 느낌. 발 썩겠군. 억지로 신고 출발할려고 하니 비가 한두방울씩 떨어진다. 오늘도 비와의 전쟁이다. 우비를 제대로 챙겨입고 걷기 시작하니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진다.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bar에 들어가 비를 피하고 가자고 하는데, 마을이 고작 1km니 마을까지는 들어가기로 한다.

 

 팔라스 데 레이에 들어가서 눈에 보인 첫 번째 bar로 들어가 언제나처럼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비는 쫙쫙 내려주시고 날은 추우니 아침 일찍 출발한 순례자들이 다들 들려 커피를 마시고 떠나간다. 카토 할아버지도 만나고 보던 얼굴들이 많다. 시간을 좀 보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도 했지만 TV 기상예보에는 완전 흑색으로 비 표시가 되어 있다. 밖을 쳐다봐도 비가 줄어들 기미는 안보이고, 결국 빗속을 뚫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비가 너무 내리니 주변 풍경이 눈에 안들어온다. 어차피 비 때문에 시야도 넓지 못해, 현정누나와 얘기하며 걷는 동안 보아와 지영이 민호는 멀리 사라졌다. 쉬어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마을 bar에 일행들이 없다. 그냥 가버린 것일까? 쉴까 말까 고민하다 bar 상태가 비좁아 따라가기고 하고 길을 나서는데 현정누나와 고민하던 bar에서 20m 안 떨어진 곳의 야외 bar에 일행들이 앉아 있다. 일행들이 어디까지 갔을까 고민한 현정누나와 나만 바보 된 느낌. 뭐냐, 이건.

 

 

 다가가보니 정호씨 일행까지 같이 있다. 정호씨가 다음 마을에 문어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고 정보를 알려준다. 점심 식사를 해야 하니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그 식당이다.


“우리 모드는 딱 세가지에요. 앉으면 먹고, 서면 걷고, 누우면 잔다.”


 보아가 웃으며 말하는데, 그 말에 수긍이 된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정말 단순하게 살고 있다. 화살표만 보고 따라가며 먹고, 자고, 걷는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단순하다면 인생의 고민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분명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 볼 수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빗속을 해치며 다음 마을로 진입하여 식당을 찾아가는데 길가에 있는 bar의 문 앞에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용만이를 발견했다. 역시 우리보다 빨리 가고 있었다.


“문어 요리 먹게 따라와”


보아가 용만이에게 외치고는 앞장서 간다. 당연히 따라오겠지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보아 뒤를 따라 음식점으로 갔는데 다른 일행들은 다 오도록 용만이가 오지 않는다. 길을 못 찾은 걸까? 아니면 식사를 주문해 놔서 못 온 걸까? 어차피 여기서 못봐도 산티아고에서 만나게 된다. 온 사람들끼리 식사 할 수밖에.

 

 Ezequiel은 오래된 음식점이고 유명하다고 하더니 여태까지 스페인 식당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다. 꼭 우리나라 막걸리 주점같은 분위기랄까. 와인잔도 막걸리 사발 같은 것을 준다. 다만, 음식으로 나온 문어 요리는 여태까지 타파스로 먹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게 유명한 요리야. 에게... 어쨓든 단백질 덩어리니 열내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집어먹는다. 꽂혀 나온 이쑤시개로는 먹기가 감질나서, 들고 다니는 젓가락을 사용하니 먹는 속도가 확실히 빨라진다. 각자 1인분씩 시켜 먹는데, 지영이와 보아는 반도 채 먹지 못하고 남기는걸 내가 다 처리해 버렸다. 이렇게 먹는데 왜 난 살이 안찌고 마르는지 모르겠다.

 빗줄기가 약해지길 바라며 일부러 음식점에서 시간을 끈다. 커피도 마시며 느긋하게 있다가 비가 잦아드는 것 같아 길을 나섰는데 비는 오다가다를 반복한다.

 

 

 현정 누나가 걷는게 신통치 않다. 발가락이 안좋아서 이 추운 날에도 샌달 신고 걸어온 사람인데, 비 때문에 이틀동안 운동화를 신고 걷고 있으니 상태가 좋을 수가 없다. 아르수아 마을에 가까워질 때쯤에는 조금 걷다 멈추고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발을 보니 피가 나고 있다. 저런 발로 걸어왔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독하다고 해야 하나.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정호씨 일행에, 야구모자를 쓴 청년 일행까지 한국인만 잔뜩이다. 저쪽팀은 이전 마을에서 장을 봐 온 것이 있다며 요리를 해먹는데 우리 일행들은 너무 지쳐있어 만들어 먹을 여력이 없다. 지영이가 피곤해해서 일찍 밥을 먹으로 나왔는데 근처에 식당이 없다. 장을 봐다 만들어 먹어야 하나 고민되는데 때마침 알베르게 1층에서 연결되는 식당이 문을 열어 그곳으로 간다. 이 지방 샐러드가 안좋다는 현정 누나의 말에 고민을 조금 하지만 너무 야채를 안 먹은 것 같아 샐러드를 시켰는데 양도 충분하고 잘 나온다. 역시 어디나 예외란 존재하는 법. 두 번째로 시킨 돼지고기, 닭, 생선 요리는 어떻게 된 것이 전부 튀겨져서 나온다. 무슨 조리 방법이 튀김 한가지인지.

 

 식사 후 알베르게로 돌아오는데 휴게실에서 정호씨가 그런다.


“일기예보에는 내일 모레까지 비가 계속 올거라네요”


 몇 일째 내린 비가 앞으로도 이틀을 더 올거라니, 정말 징그럽게도 온다. 갈라시아 지방 답다고 해야 하나. 현정 누나 발 상태로 30km를 가기는 분명 무리다. 비가 내일 계속된다면 다들 19km만 갈 분위기다. 그러면 그 다음날 산티아고까지 20km. 어떻게 해야 하나. 용만이는 분명 30km를 갈텐데, 혼자서 가야 하나 아니면 이들과 함께 해야 하나.

 

 쉬고 있는데 민호가 술 생각이 났는지 한잔 하자고 말을 건낸다. 용만이가 없으니 민호와 카냐의 길을 이어가게 된다. 민호와 둘이 나가는데 보아가 따라나선다.


“오빠, 스페인 지도 혹시 있어요?”


 술을 마시다 갑자기 보아가 묻는다. 산티아고 길의 끝이 보이니 다음 일정을 계획하기 위해서다. 보아는 예전에 마드리드 주변 관광을 다 했었기에, 이번에는 스페인 남부로 내려갈 예정이다. 현정누나와 보아는 남부로, 어머니와 소화누님, 민호, 지영이는 마드리드로, 용만이와 아버님은 맥주 관광을 한다고 독일로 갈테고, 난 어디로 가야하나?

 

 여길 올때 땅끝마을 피니스테레(Finisterre)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정도 40일 이상을 잡았었고. 그런데 지금 속도라면 산티아고에 32일째에 들어서게 된다. 예상보다 너무나 빨라 시간이 남는다. 혼자서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갈까, 아니면 중부지방에 있다는 트렉킹 코스로 가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산티아고 길을 거진 다 걷도록 난 아직도 헤매고만 있는 건지, 몸은 피곤하고 머리는 복잡하고 정리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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