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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고니* 2013. 3. 11. 13:10

 11월 1일 월요일

페드로우소 (Pedrouzo) -> 산티아고 (Santiago de Compostela) 20km

 드디어 산티아고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기분이 묘하다. 더구나 어제 어머니의 말씀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지영이 소원 들어주기가 더더욱 공포로 다가오고, 헛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니 잠이 안 온다.

 

 오리손 산장에서의 만남이 우연이었다면 수리비에서 어머니가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우리가 뭉치게 된 건 인연이었을 거다. 그리고 팔라스 데 레이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만난 건 필연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첫 번째 만남은 우연, 두 번째 만남은 인연, 세 번째 만남은 필연이라고 한다. 우연과 인연은 사람의 의지와 상관 없지만, 세 번째 만남, 그것은 사람이 보고 싶어 찾아가기 때문에 필연이 되는게 아닐까?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신타아고에 도착했을 때 난 눈물을 보일까?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다. 인생 복불복 게임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내 인생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하는건데 왜 이리 심난한 것인지...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릴건지 하늘은 흐려있고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한다. 알베르게 맞은편 바(bar)에서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한다. 다들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에 심란한지 일찍 일어났는데 짓궂은 날씨 때문에 출발 시간은 역시나 늦어졌다. 오늘 거리는 20km. 평소 걷던 거리일 뿐인데, 다들 마지막 날이라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몸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산길을 걸어 고개를 하나 넘어 산티아고 공항 옆을 지나가도록 바(bar)가 나타나지 않는다. 중간 지점이라 생각한 마을에는 바(bar)가 없고 길은 엉뚱한 곳으로 돌고 돈다. 보아는 허리가 안좋고, 현정누나는 발가락이 때문에 걷는게 이상하고, 지영이는 발바닥에 통증이 있고, 난 무릎이 말썽이다. 완전 종합병동이다. 다들 쓰러지기 직전에 알베르게 겸 식당을 찾았다. 시원한 카냐(생맥주)가 갈증을 달래준다. 내가 산티아고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분명 알콜의 힘이였으리라. 하몽 보카디요로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 준비를 한다.

 

 

 우리가 몇일동안 용만이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보여주자며 보아와 현정누나가 우비에다가 테이프를 붙이고 ‘용만이를 찾습니다’라고 적어 넣는다. 외국인들이 한글을 모르니 다행이지 이거 한국에서 했다가는 정말이지... 외국에 나와 있으니 다들 얼굴이 두꺼워지는것 같다.

 

 

 

 고개를 몇 번 넘어가니 밑으로 산티아고 도시 전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기가 바로 산티아고. 그러나 별 감흥이 없다. 그냥 여기까지 무사히 왔구나 그 생각만 든다. 산티아고 입구에 들어서고도 대성당까지는 약 5km 정도를 더 가야 한다. 구시가와 신시가의 거리가 그만큼 크다. 알베르게에서 묵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편한 호스텔을 나두고 구시가 근처 공용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짐을 풀고 샤워도 한 후에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곳을 찾아간다. 크레덴시알을 확인하고 증서에 이름만 써 넣으면 끝. 뭐가 이리 간단한지 그동안 한달 넘게 걸어온 것이 허무해진다.

 

 

 약속시간 5시까지 시간이 남다보니 선물가게에서 다들 티셔츠 쇼핑에 열중한다. 현정누님은 빨간색이, 보아는 파란색 티가 더 이쁜 것 같은데, 다들 배가 나왔다며 어두운 색 옷을 찾는다. 도대체가 여자들이란. 남이 보기엔 마른 체형이거나 딱 좋아 보이는데 꼭 살쪘다고 한다. 왜 그러는지.

 

 

 5시에 맞춰 대성당 앞으로 가보지만, 용만이와 소화누님이 보이지 않는다. 오다가 잘못된건 아니겠지. 시간이 넘어서니 슬슬 불안해진다. 왔다면 안오실 분들이 아닌데... 어쩌나 싶은데 멀리서 용만이가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우리는 대성당 후문쪽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님과 소화누님은 정문 앞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길이 어긋났던 거였다. 오늘도 또 이산가족 상봉 연출해 준다. 용만이는 그동안 있었던 얘기를 쉴새없이 늘어놓는다. 역시 용만이가 있으니 조용할 틈이 없다. 그제 음식점을 따라오다 길을 잃어 현지인에게 길을 물었었는데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1시간을 헤맸고, 어제는 산티아고 앞까지 와서 묵고는 오늘 아침 9시에 들어왔다고 한다. 역시 내 짐작대로 어제 많이 걸었다.


“누나 여기서 뭐 찾았는지 알아요? 버-거-킹!”


 용만이의 버거킹 소리에 현정누나와 보아 전에 맥도날드 때보다 더 광분한다. 그렇게도 좋을까?

 

 우선 저녁부터 먹기 위해 레스토랑 골목을 찾아갔는데 관광지답게 가격이 많이 비싸다. 어디가서 배불리 먹나 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케밥집.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이 최고지. 케밥집 2층에 올라가 간만에 쌀로 된 음식을 배불리 먹으니 너무나 좋다.

 

 산타아고까지 무사히 온 것을 축하하자며 아버님이 다들 서로 안아주자고 제안하신다. 돌아가며 서로 포옹하고 산티아고에 들어선 것을 기념한다. 원래 포옹 같은거 잘 안하는데, 이번 만큼은 분위기 때문일까 술기운 때문일까 일행 모두와 포옹을 한다. 현정누나가 자기 몸무게 많이 나간다고 해서 포옹했을 때 들어보았는데 술기운 때문에 힘이 넘친건지, 아니면 현정누나가 생각보다 가벼웠던 것인지 너무 들어서 허리가 살짝 꺽였다. 장난 한번 잘못쳤다가 허리 나갈뻔 했다.


“승호야, 너 내일 어떠할거야?”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갈까 생각중이에요”


현정 누나가 내 일정을 궁금해 한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한국인 아주머니 한분이 일행들과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간다고 해서 따라갈까 생각중이었다.


“형, 그냥 피니스테레는 버스타고 갔다오고 같이 마드리드가요”


용만이는 다른 일행들과 좀 더 여행을 같이 하고 싶다며 마드리드로 같이 가자고 한다.


“마드리드 관심 없으면 보아 따라 가던가”


 현정누나가 말을 하는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이 안된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네프킨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를 써넣는다.


1. 바로 표 끊어서 귀국한다.

2. 원래 계획대로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간다.

3. 현정 누나 따라 마드리드로.

4. 피니스테레를 버스로 갔다오고 혼자 살라망카로 간다.

5. 보아 따라 세비야로...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이 중에 뭘까?


“소화누님 1번부터 5번 중에 하나 골라보세요”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어서 소화누님한테 숫자 하나만 골라보라고 부탁했다. 잠시 생각하시다가 고른 번호는


“3번”


 결국 일행들과 여행을 더하게 됐다. 내일 기차표를 예매하러 산티아고 역을 갔다오면서 보아가 내일 혼자 세비아로 떠나기 때문에 이별 파티를 하러 술집을 찾아간다.


“오빠,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팔짱 좀 끼면 안돼요?”


보아가 갑자기 내게 물어오는데, 팔짱이라... 난 팔짱 끼는걸 싫어한다. 워낙 간지럼을 많이 타다보니 누군가가 내 몸에 손 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친누나가 팔짱 끼는것도 싫어하는데.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보아 말이 걸린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팔짱을 끼는데 워낙 안하던 짓이다보니 내가 보아 팔짱을 껴버린다.


“아니, 무슨 남자가 팔짱을 껴요”

“나 원래 이러거 잘 안해요. 그냥 손이나 잡고 가요.”


안하던 짓 하니까 실수하는거지. 팔짱 풀고 보아 손을 잡아버렸다.


“언니, 나 오늘 계 탔다”


 내가 손을 잡아주자, 잡은 손을 흔들며 보아가 현정누나한테 자랑한다. 내가 손잡아 주는게 계 탔다고 표현할 정돈가. 내가 그동안 그렇게 까칠했나. 보아한테 미안해진다. 보아 손이 차갑다. 보아 손이 추울까봐 잡은 손 그대로 내 겉옷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니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된다. 원래 손발이 차가운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 손이 따뜻하다. 왜 그럴까? 기분이 묘하다.

 

 다른 일행들이 술집 안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문 밖에서 용만이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카를로스와 루이스 아저씨가 지나가는게 보인다. 얼른 현정누나를 불러내서 따라갔다. 우연한 만남에 현정누나 뿐만 아니라 두 아저씨들도 너무나 즐거워 한다. 참 질긴 인연이고,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두 분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번 산티아고 길은 내게 충분히 의미있었다.

 

 찾아간 술집은 타파스도 훌룡했지만, 술맛이 달면서도 부드러운게 독특하고 정말 좋았다. 지영이가 여길 나간 후에 소원을 말하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원을 말할까 두렵다. 그래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우선은 이 시간을 즐겨 본다.

 

 술집에서 나오자 지영이가 소원을 말하겠다며 날 끌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여성 5명이 둘러싸고는 소원을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 뽀뽀해 주세요”


 5명 모두에게 뺨에 뽀뽀를 하라니. 처음에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그걸 어떻게 해. 다른 소원 들어주면 안돼요?”


내가 난색을 표해보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고, 씨알도 안먹힌다.


“어머, 승호야, 난 이마에 해줘”

“인증샷은 제가 찍을께요”


현정누나와 보아가 한술 더 뜬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원래 애정 표현 같은거 안하는 놈한테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원래는 안아달라고 할려고 했는데, 아까 저녁 먹을때 아버님이 시키셨잖아. 그래서 지영이가 강도를 높였어”


현정누나가 설명을 해주는데, 고의는 아니라도 아버님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졌다니 기가 막힌다. 할려면 못 할거야 없지만 안하더 짓을 할려니 너무나 어색한데, 현정누나가 자꾸 오버하니 허탈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보아 뺨에 뽀뽀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쁘지만, 어차피 헤어질 사람과 자꾸 추억을 만드는게 한편으로는 괴롭다.

 

 내가 머뭇거리며 웃는 바람에 다섯명 모두에게 뽀뽀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중에 인증 샷을 보니 지영이는 날 제대로 골탕 먹인게 아주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너, 이제 말 잘 들어야해. 잘못 보이면 이 사진들 인터넷에 뿌린다.”


한건 잡았다 이건가. 현정누나가 사진으로 날 협박한다. 그 사진에 나만 찍혔나. 그거 뿌리면 누나도 망신살 뻗치기는 똑같은데 무슨.

 

 쉴 사람들은 들어가고 보아와 현정누나는 인터넷으로 예매를 해야 한다고 PC방으로 간다. 용만이와 함께 소화누님을 호텔에 모셔다 드리고 PC방에 가서 보아와 현정누나를 데리고 버거킹으로 간다. 저녁에 타파스에 그렇게 먹어놓고도 버거킹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까.

 

 햄버거까지 다 먹고 용만이를 숙소에 데려다주기 위해 대성당을 다시 오른다. 한번 잡은 손 놓기 싫어서일까 자연스럽게 보아 손을 잡고 걸어간다.


“쟤들 헤어지기 싫어하는거 같지”

“그렇죠”


현정누나와 용만이가 속닥이는데 다 들린다. 내가 헤어지기 싫은 건 분명하지만 보아도 그럴까?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렇게 보아 손 차갑지 않게 잡아주는게 다인데...

 

 용만이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보아와 현정누나와 알베르게로 돌아가는데 길을 잃어 역으로 가는 길을 다시 내려간다. 길을 찾아 알베르게까지 오면서 엽서 파는 곳을 찾아본다. 내일 아침에 헤어지게 되는 보아에게 글이라도 남기고 싶은데 너무나 늦은 시간이라 문 연 곳이 없다. 포기하고 알베르게로 들어가는데 알베르게 카운터에 엽서가 놓여 있는게 보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찾고자 하니 어떻게든 찾아진다.

 

 깜깜한 알베르게 방안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엽서를 쓴다. 보아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 뱉어낼 수가 없다. 결국, 그냥 작별인사만 간단하게 적고 만다. 남은 여행 몸 건강히 즐겁게 지내기를 빌어줄 수밖에. 슬프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