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10월 31일 일요일
아르수아 (Arzua) -> 페드로우소 (Pedrouzo) 19km
시계를 보니 6시다. 꽤 오래잔 것 같은데 6시라. 일어나 나갈려고 하는데 보아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알려준다.
“오빠, 오늘 썸머 타임 변경되는 날이에요. 1시간 늦어져요”
이미 충분히 잤으니 더 침낭속에 있어봐야 잠은 오지 않을 거다. 보아가 친절히 알려주지만 난 퉁명스럽게 됐다고 말해버린다. 몇일 후면 헤어질텐데 더 정들면 나만 괴롭기에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된다.
1층 휴게실로 내려가 짐 정리를 하고 있으려니 민호가 내려온다. 매일 늦잠자는 녀석이 어쩐 일인가 했더니 추워서 못자겠다는데 그렇게 추웠나. 벽난로를 피워줄려고 하는데 잔가지가 없다. 마분지와 나무상자 조각으로 한참을 씨름해서 간신히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들이 내려오고 나서 내 ipod이 자동으로 시간 변경이 되었다는걸 알았다. 어째 아침에 일어날 때 늘어지는 느낌이더라니. 괜히 보아한테 까칠하게 굴었다.
출발 준비를 하는데 그동안 그쳐있던 하늘이 또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하여간 운도 지지리도 없다. 어차피 아침을 먹어야 하니 비가 좀 잦아들때 바로 앞에 있는 바로 건너간다. 아침을 먹는데 어제처럼 카토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보던 사람 계속해서 쭉 보게 되는 산티아고 길 답게 아침부터 또 만났다.
가지고 다니던 치즈, 밤 등 음식물들을 다 처리해 먹으며 시간을 보냈더니 비가 확실히 줄어든다. 비가 갤 일은 없을테니 지금이 떠나는게 나으리라. 길을 가는 내내 비는 오락가락한다. 길은 진창이고, 산티아고 길 마지막 주가 비로 인해 고역이다. 비가 하도 오다보니 길목 중간에서 만나는 바(bar)들은 사람들로 붐빈다.
산길을 내려가다 나타난 바(bar)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어간다. 우리가 들어서자 마자 오락가락하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해 내리붓는다. 너무나 많은 비에 사람들이 바(bar)로 피신을 하는데 아는 얼굴들이 많다. 바(bar)에 앉아 있으니 나가기가 싫어진다. 비바람이 불면 날씨가 나쁘다고 기다리고, 햇빛이 나면 귀찮다고 삐대며 늘어진다. 오늘 거리가 19km 인데 날씨도 얄궃고 마음도 신숭생숭하고, 어떻게 걷다보니 3시가 넘어서야 페드로우소 (Pedrouzo) 마을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묵는 알베르게니 좋은데서 편하게 쉬자고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어느 침대를 사용할지 직접 고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한가운데 유리로 둘러쌓인 나무가 눈에 딱 들어온다. 그 부분만 2층 까지 뚫려있어 햇빛이 그대로 쏟아진다. 구라 세자매는 그걸 보자마자 바로 옆자리를 쓰겠다고 아우성이다.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마지막 밤인데 이렇게 운치 있는 정경을 보면서 잠드는 것도 좋으리라.
여전히 소화누님과 용만이, 아버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걷는 도중에도 보지를 못했다. 다들 잘 걸어오고 있겠지. 오늘은 용만이를 만나 일정 조정을 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땅끝마을까지 걸어가면서 일정을 짜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산티아고 이후를 생각하기가 싫다.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일이면 끝이라니, 뭔가 공허함이 가슴속에 생긴것 같다. 그리고, 내일이 이들과의 마지막 날. 이제 진짜 헤어져야 하는구나. 그렇게 벗어날려고 했는데 지금은 도리어 헤어지는걸 걱정하고 있다니, 그동안 너무 정들었다. 귀국까지 보름이상 혼자 여행할 생각을 하니 벌써 외로워진다. 확, 비행기 표 바꿔서 바로 귀국해 버릴까?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어떻게든 남은 여행을 계속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 그 빈자리는 클 것이라는 것도 너무나 명확하다.
내가 잡은 2층 침대 옆자리가 어머니 자리라 앉으면 서로 얼굴을 보게 된다. 이제 산티아고 길도 내일이면 끝이라 더 이상 얘기할 기회이 없을것 같아서일까. 어머니가 내게 계속 그러신다.
“본능이 이끄는데로 가. 확 저질러 버려. 가끔은 이성을 버리라고”
내가 그럴 수 있나. 연륜이 있는 사람 눈에는 보이는 것일까? 내 마음의 갈등이. 어머니 눈에 내 마음이 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소화씨랑 걸으면서 얘기를 많이했는데, 소화씨가 그러더라. ‘여기서 한명 못 잡으면 승호 바보라고’”
내가 생각해도 난 바보니까. 만약 본능만 따라 일을 저지를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방황을 하지도 않았겠지. 놓치고 가슴 아파 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그리고 이 길 위에 서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내 가슴에 슬픔이 있기 때문일까, 다른 이의 슬픔에 더 끌리는 것은... 먼 훗날 이 글을 읽고 지금의 기분을 다시 떠올리 수 있을까? 그 때 난 추억을 회상하며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저녁을 먹고 구라 세자매가 맛있어 보이는 제과점을 찾았다며 후식으로 조그만 케익들을 사왔다. 저녁 먹고 바로 케익을 먹으려니 다들 들어갈 배가 없다.
“가위바위보 해서, 걸린 사람이 하나씩 먹기로 해요”
남기기도 뭐하고 게임을 제안했는데, 어떻게 3번 연속으로 걸린다. 돌겠네. 정말 먹는게 고역이다.
“먹기 힘들면 백장미 불러 보던가”
현정누나가 마지막 1개를 먹으려는데 백장미 한번 불러보라고 말을 꺼낸다. 억지로 먹으면 먹을수는 있는데, 게임의 재미를 위해서 해봐. 아무리 봐도 현정누나는 더 먹을 여력도 없지만 바로 거부해서 날 엿 먹일테고, 지영이 아니면 보안데... 지영이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는 모르지만 정말 감당하기 힘들거라는건 뻔하다. 역시 무난하기는 보아. 보아 소원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수 있다.
“그럼 보아씨.”
“나 정말 더 먹기 힘든데”
내 지목에 보아가 정말 먹기 버거웠는지 어떻게 먹나 주저하는 사이에 지영이가 보아 손에서 케익을 뺏어 먹어 치워 버린다. 지영이가 어째 날 골탕먹일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내가 왜 백장미를 불렀을까. 내 무덤을 판 것 같은게 느낌이 어째 으스스하다.
“내일 산티아고 도착한 후에 소원 말할께요”
매도 빨리 맞는게 낫지, 나중에 맞으면 공포감만 더 생긴다. 할려면 지금 당장 할 것이지 왜 하필 내일 산티아고야. 더 무섭잖아.
보아는 내일 모레에 세비야로 가겠다며 비행기 표를 예매한다. 같이 가기로 했던 현정누나는 발 때문에 도저히 안되겠다며 지영이 따라 마드리드로 가서 호텔에서 푹 쉬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 보아가 혼자 가는구나. 여행 잘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혼자 간다니 걱정이 된다.
내 자리로 돌아와 보니 엽서가 있다. 지영이가 모두에게 쓴 엽서. 진짜 내일이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느낌이 더 선명하게 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운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가슴 한편이 허전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모두 즐겁고 행복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