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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고니* 2013. 3. 11. 13:07

 19월 29일 금요일

포르토마린 (Portomarin)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25km

 비싼값을 하는 걸까. 아니면 어제 마신 술기운일까. 배드벅도 없고 따뜻해서 새벽까지 푹 잤다. 6시에 일어나 짐 정리하고 핫도그를 만들려고 하는데 전기렌지가 작동을 안한다. 전원을 내려 놓은 것 같은데 스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7시가 되자 카페테리아를 열기 위해 직원이 나온다. 직원에게 얘기를 한 이후에야 전기렌즈에 전원이 들어온다.

 

 양파를 썰어서 볶고 있는데 현정누나와 보아가 지영이 데리고 아침 먹고 출발하겠다며 먼저 간다고 나간다. 현정누나와 보아가 가고 난 후에 매일 늦잠자던 민호까지 부지런 떨면 나가고, 소화누님도 떠나신다. 어머니는 아예 늦게 출발하시겠다고 계속 침대에서 수면중이시고. 진짜 흩어지는 걸까. 날도 우중충한데 기분이 가라앉는다.

 

 

 용만이와 아버님과 핫도그에 스프로 아침을 먹는다. 9명이 먹을려고 산 스프 2개를 버리고 갈수 없어 다 털어 넣어 끓였더니 스프가 너무나 짜다. 가득이나 기분이 가라앉았는데 스프가 너무 짜다보니 입맛이 없다. 이제 더 이상 밥을 해먹을 것 같지도 않아 용만이는 그동안 얼마 먹지도 않고 가지고만 다닌 양념통 5개를 알베르게에 남겨 두고 떠날 차비를 한다. 8시가 되기 전에 떠나려는데 빗방울이 한 방울 얼굴을 때린다. 하늘이 시꺼먼 것이 날이 심상치 않다. 나중에 비 맞느니 좀 덥고 말지 하는 심정으로 우비를 챙겨 입고 출발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산길 오르막이 시작된다. 한참을 올라간 후에 평지길, 그리고 구릉을 넘나드는 길의 연속이다. bar가 나오면 커피나 한잔 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마을이 안나타난다. 이렇게 거리가 길었나. 지영이나 보아가 없으니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볼수도 없다.

 

 

 산길이 차도와 만날 때 쯤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조금 가니 길가에 bar가 보인다. 비도 오는데 몸을 녹이고 가야지. bar에 들어서니 민호가 혼자 있다. 커피를 시키고 앉아 있으려니 보아를 선두로 구라 세자매가 들어선다. 결국 가봐야 뻔하지, 이렇게 다 만날걸 흩어지겠다고 뭐하는 건지.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지영이는 혈색도 좀 괜찮아진 것 같고 다들 다시 보게 되니 안심이 된다.

 

 쉬는 시간이 다들 다르다보니 bar를 떠나면서 다시 흩어져 버린다. 우비 때문에 배낭 꺼내기가 귀찮아 크레덴시알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길을 나선다. 비는 약해질 기미가 없다. 일주일도 내리 비가 온다는 갈라시아 지방의 비맛을 제대로 보게되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동안 알베르게에서만 스탬프를 찍었더니 크레덴시알에 남은 공간이 많다. 이렇게라도 찍지 않으면 산티아고 도착했을때 텅텅 빌 것 같아 가는 중간에 나오는 bar에 들러 스탬프만 찍어 댄다. 바지 주머니에 크레덴시알을 넣어두니 스탬프 찍기 편하다고 이때까지는 좋아했다. 나중에 비에 크레덴시알이 쫄딱 젖어 스탬프가 번져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비가 너무 오다보니 바지가 젖으면서 물이 등산화 안쪽으로 흘러내려 결국 등산화 안으로 물이 차 버렸다. 두꺼운 등산화 양말이 물을 잔뜩 머금다보니 걸을때마다 느껴지는 느낌이 꼭 물 먹은 스펀지 위를 걷는 느낌이다. 양말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데 느낌이 찝찝한게 영 안좋다. 이건 잠시 쉰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가서 말리는 것이 상책이다.

 

 쉬지 않고 걷는다. 비가 하도오다보니 사진 찍을 엄두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빨리 쉬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그냥 최대한 빨리 걸을 뿐이다. 무릎이 안좋은것도 이때는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모르겠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아까 bar에서 쉬고 난 후 거의 16km 이상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팔라스 데 레이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끝냈을 때가 1시 50분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친듯이 걸었다. 몇일 후에 만난 아버님이 그러신다. 그때는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는 것 같았다고.

 

 아무도 없는 알베르게에 홀로 짐을 풀고 있으려니 외롭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고, 날은 쌀쌀하다. 다들 잘 걷고 있을까? 여기까지 올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알베르게 세탁기가 작동을 안해 손으로 물에 적셔 헹구기만 하고 건조기를 돌리는데 민호가 알베르게에 들어선다. 민호도 쉬지 않고 걸어왔다고 한다.

 

 

 

 민호와 점심을 해결하러 나가는데 야구 모자쓴 청년, 부산 아가씨, 아저씨 팀을 만났다. 여기 묵을 것 같더니, 알베르게 아저씨와 얘기를 하더니 여기가 팔라스 데 레이가 아니란다. 여기서 1km 더 가야 한다나, 여긴 외곽 지역이라고 알려준다. 그래서, 다른 순례자들이 계속 지나갔구나.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외곽 지역이라 그런지, 묵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아주 조용하다. 이상한 커플 빼고는...

 

 점심 먹을 곳이 달랑 한 곳 뿐이다. 상점도 없다. 정말 너무 조용한 곳이다.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오늘의 메뉴)를 시켜먹는데 밥 종류 요리는 괜찮았는데, 돼지고기가 완전 소금덩어리다. 스페인 음식은 간혹 너무 짜다. 이런걸 어떻게 먹는건지, 소금 못 먹어서 죽은 조상이라도 있었나 싶을 정도다.

 

 비가 계속 내려 우울해져서일까 자꾸 감상적이 된다. 비울려고 온 길인데 이제 3일정도 남은 산티아고 일정인데 과연 난 버리고 갈수 있을까? 억지로 비울려 한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닌게 마음인 것을... 엉뚱하게 채우고나 있고....

 


 

“민호야, 내가 가장 슬픈게 뭔지 아니?”


내가 왜 이 얘기를 민호에게 꺼냈는지 모르겠다.


“그건 울 수 없다는 거야. 난 어느 순간 우는 법을 잃어 버렸어. 내가 언제 울어봤는지 기억이 없다.”


내 기억속에는 엉엉 소리내어 울어본 적도, 눈물이 넘쳐 뺨으로 흐른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슬퍼도 눈에 눈물이 고이는게 고작이다.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남자는 우는게 아니라고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울고 싶다. 소리내어 엉엉 울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 가슴은 언제 어떻게 망가졌는지 울지 못한다. 그게 너무나 슬프다.


“슬플 때는 엉엉 울어도 보고, 기쁠 때는 환하게 웃고, 그렇게 감정 표현하면서 살아”


 나도 못하는 걸, 왜 이런 충고를 민호에게 했을까. 그냥 감상적이 되다보니 내 푸념이랍시고 한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아에게 들었다. 내가 한말을 듣고 민호가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자신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울어본 적이 없다고. 그런 사실도 몰랐는데 내가 왜 민호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까? 무의식적으로 민호의 슬픔을 느꼈었던 걸까? 지금와서 생각해도 모르겠다. 다만, 산타아고 길을 걸으면서 망가졌던 내 가슴이, 꽁꽁 잠겨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아 열리기는 했던 것 같다.

 

 알베르게 돌아와 세탁물 걷고 젖은 신발도 처리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비가 잦아든다. 민호는 산책하겠다고 나가고 조용한 알베르게에 혼자 있으니 낮잠 자기 좋다. 비속에 떨면서 걸었더니 노곤해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민호가 흔드는 바람에 깼다.


“형, 세자매가 왔어요”


뭔 소리야. 자다가 깨니 민호 말이 잘 이해가 안된다.


“누나들이 형한테 인사하고 간다고 기다리고 있어요”


 잘못된 곳에 멈췄기에 산티아고 전에는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거지. 저녁때가 다 된 이 늦은 시간에 고작 여기를 왔다니 이해가 안된다.

 

 알베르게 입구에 나가보니 세자매가 우의를 뒤집어쓰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여기 멈출려고 했는데, 세탁기하고 건조기가 없다잖아. 그래서 더 갈려고. 너한테 인사는 하고 갈려고 기다렸다.”

“네? 세탁기는 작동 안해도, 건조기는 잘만 되던데요. 무슨 말이에요?”


 건조기 비용이 1유로 밖에 안해서 내가 2번이나 돌려가며 세탁물을 바짝 말렸는데, 이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건조기가 있어?”


 내 말에 세자매가 황당해 한다. 알베르게 관리인 아저씨가 세탁기가 없다고 했다나. 그분 영어도 안되는 분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건조기가 있다는 내 말에 세자매 바로 숙박하러 체크인 한다.


“그런데, 여태 뭘 하다가 온 거에요? 이렇게 늦게 오다니”

“비가 하도 와서 오는 중간에 bar에 들어가서 비 그치기 기다리다가 온거야.”


 2시까지 벽난로가 있는 bar에서 신발 말리며 주구장창 있었다나. 그래도 어떻게 뿔뿔히 흩어지고도 이렇게 만나게 된다. 누구와 다시 만나니 반갑고, 인연이 질긴게 이럴 때는 좋네.


“여기 사람도 적고 조용하다”

“네, 조용하죠. 저기 이상한 커플만 빼고요”


 알베르게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2층 침대는 2개가 맞닿아 있다. 거기 1층에 여자 두명과 남자 한명이 같이 누워서 계속해서 낄낄대고 있다. 스페인어라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잘하면 오늘 성인물 하나 보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머, 승호야. 너 부럽구나. 어떻게 보아랑 지영이 사이에 눕혀줄까”


 내 농담에 현정누나 역시 한술 더 뜬다. 내가 미쳐. 어떻게 날 놀릴 소재는 놓치지를 않는다. 어째 여기서 머물겠다고 한 이유가 건조기 때문이 아니라 날 놀려먹는 재미를 놓치기 싫어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알베르게에 있는 주방기구라고는 냄비 하나, 후라이팬 한 개가 전부다. 흔한 수저나 포크, 심지어 컵조차 없어 식사를 만들어 먹을 수 없는 분위기다. 저녁은 아까 식사를 했던 옆에 bar로 가기로 하고 여자들이 세탁하는 동안 민호와 둘이서 마을로 아침거리를 사러 간다. 1km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거리가 되는데 덕분에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나타나는 멋진 광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먹을거리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와 계신다. 이전 알베르게에서 멈춰 신발까지 다 말리고 쉬고 있었는데 비가 그쳐서 다시 출발해 오셨다고 한다. 흩어지자고 하고서는 결국 6명이 다시 뭉쳐 버렸다. 이게 헤어지는 건가요? 말을 꺼냈던 소화누님과 헤어지기 싫다고 했던 용만이와 아버님만 떨어졌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 소화누님도 걱정되지만 용만이가 아버님과 잘 지낼지도 걱정이다. 차라리 세 사람이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안심이 될 것 같다.

 

 Bar에 가서 간단한 타파스 여러 종류를 시켜 저녁으로 먹는데 원래 안주다 보니 양이 적다. 결국 이것저것 계속 시키다보니 6명이 메뉴 델 디아를 먹는 돈만큼 나와버렸다. 간단하게 먹겠다더니 이게 간단하게 먹는 건지. 먹는 거에 한해서는 구라 세자매 말은 확실히 구라다.

 

 내일은 오늘 안간 거리 1km를 더해서 아르수아(Arzua)까지 29km를 가야 한다. 제발 비가 안와야 하는데. 오늘 폭삭 젖은 신발이 제대로 마를지도 걱정이다. 정말 샌달 신고 가야 하는 일이 없기를.... 글을 쓰는데 10시라고 바로 불이 꺼진다. 여기도 시스템으로 작동시키나. 자라고 하니 자야겠지. 원하지 않게 헤어지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나게 된 하루. 알수 없는 이 인연이 언제까지 계속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