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 2013. 3. 11. 12:58

10월 19일 화요일

푸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 -> 레온(Leon) 12km

 간지러움 때문에 깨어보니 2시도 안됐다. 배드벅이 너무나 극성이다. 어제 보아가 배드벅 스프레이로 방역을 다 했는데도 효과가 없다. 간지러워서 깼는데 타이밍 기가 막히게 외국인 아저씨가 코골이를 시작한다. 아, 멀리 날아간 나의 숙면이여. 어차피 아침을 사먹기로 했으니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다. 추위와 싸우며 아침 7시까지 침낭속에서 배드벅과 사투를 벌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매트리스를 뒤집어 봤다. 온통 검은점 투성이... 골라도 이런 알베르게를 골라 들어오다니. 그런데 그렇게 간지러웠는데 정작 물리지는 않았다. 진짜 빈대도 낯짝이 있나.

 

 용만이가 어제 파전 해먹고 남은 야채를 볶고, 밀가루 반죽은 호떡처럼 요리해서 가져온다. 빈속에 나가기에는 너무 추운 아침이라 다들 조금씩 요기를 한다. 용만이 녀석 어제 남은 닭 한 마리 삶아서 먹고 가겠다고 물을 끓이는데 먹을것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다. 결국 삶아서 먹는데 안쪽에서 핏물이 나온다. 그걸 핏물 안밴 부분만 도려내서 먹어치우는데, 그 식성이란 정말 어디가서 굶어죽지는 않을 놈이다.

 

 용만이가 요리한다고 시간을 끌다보니 8시가 돼서야 출발한다. 어차피 12km 대충 3시간만 걸으면 될테니 급할건 없다. 어제 걸었던 대로를 따라 다시 걷는다. 아침부터 차들이 많이 다니는데 그 옆을 따라 걸으려니 조금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레온까지 가는건가 싶었는데 바로 오른쪽 소로로 길이 떨어져 나간다. 대도시 레온이 가까워지다보니 송전탑이 많다. 덕분에 전선줄들이 줄줄이 하늘에 걸려있다보니 별로 경치 구경할 맛이 안난다.

 

 

 조그만 언덕위에 아르카우에하(Arcahueja) 마을이 나온다. bar가 산티아고 길에서 80m나 떨어져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어 그냥 지나칠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한턱 내시겠다며 쉬어가자고 하신다.


“은하 언니, 오늘 남편분으로부터 은혜 입는 날이야”


소화 누님이 웃으며 말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은혜를 입다니?  뭔 말이야. 아버님이 설명해 주신다. 수비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그동안 아버님이 빌려주신 500유로로 버텨오셨는데 레온에 들어가면 남편분이 보낸 돈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송금 받는 날을 은혜 입는 날이라고 표현하시다니, 어머니 표현법은 가끔씩 내 상상력을 넘어선다.

 

 

 

 어머니가 사신 커피와 크로아상을 먹으며 bar에서 느긋하게 쉰다. 12km 정도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다들 빨리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bar를 나와 레온을 향해 출발하니 앞쪽에 고개가 보인다. 고개를 넘으니 다시 또 멀리 고개가 있다. 계속 평지길만 걸어왔는데 레온을 앞두고 고개라니. 두 번째 고개를 넘어 도로변 육교를 건너니 언덕 밑으로 레온 도시가 나타난다. 대도시 답게 평지에 넓게도 펼쳐져 있다. 신시가를 한참을 가로질러 구시가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어린 학생들이 견학을 와 있다. 모두가 ‘buen camino'라고 외치는데 일일이 대답해 주기도 힘들고, 흡사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것 같다.

 

 

 여기 알베르게는 남녀 따로 큰 방을 쓴다. 지영이와 현정누나는 아직 도착을 안했다. 어차피 핸드폰이 있으니 나중에 연락해서 만나면 되리라. 다들 간단하게 짐정리하고 쇼핑도 할겸 거리 구경을 나선다. 구시가를 걸어가다 등산용품점을 발견하고는 들어간다. 장갑과 렌턴에 눈만 뚫린 도둑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스크 두건도 하나 마련한다. 지금도 아침 추위 때문에 손과 목이 시려워 죽겠는데 레온을 지나면 다시 산악지형이다. 준비없이 들어갔다가는 정말 죽겠다 싶어지니 다들 추위에 대비해 쇼핑에 열을 올린다. 등산용품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지영이와 현정누나가 왔다. 다시 다 모였다고 여성들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데 이건 뭐 몇 년 헤어져 있다 만난 사람들 같다. 호들갑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그래도 얼굴은 다들 괜찮아 보이네.


“용만아, 여기 까르푸도 있더라. 거기서 뭘 발견했는줄 알아?......맥도날드”


현정누나가 맥도날드라고 하자 용만이와 보아 동시에 함성을 지른다. 아니 보아야 노르웨이에서 맥도날드 구경을 못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용만이 넌 뭐냐. 한국에 있었던 놈이 왜이리 흥분이야. 한식도 아니고 맥도날드에 왜 저리 좋아할까 의아했는데 나중에 보아가 그런다. 외국에 너무 오래있다보니까 한국에 있는 것, 한국을 떠올릴수 있는 것만 봐도 그냥 좋다고.


“여기 백화점도 있어요”


지영이 말에 어머니, 소화누님까지 가세해서 비명이다. 여자들에게 쇼핑이란 정말....


“우린 오전에 백화점가서 쇼핑 다 끝냈어”


지영이와 현정누나는 아침부터 백화점 들어가 한바퀴 돌고 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현정누나 옷이 다 바뀌어 있다. 집 앞 슈퍼가는 듯한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이 말쑥한 등산복으로 바뀌어있다.

 

 여자들이 백화점가서 쇼핑하겠다는데 남자들이 무슨 힘이 있나. 따라가야지. 근데 용만이 녀석은 여자들보다 더 흥분해있다. 문명의 냄새가 그리웠다나. 그래, 문명 많이 즐겨라.

 

 분명 목적지는 백화점이었는데, 가는 중간에 발견한 저렴한 중국 상점으로 들어간다. 이름부터 완전 중국스러운 blue dragon, 청룡에서 쇼핑을 끝내버렸다. 이제 살것이 없으니 백화점은 안가겠지 했더니, 식사를 백화점가서 하잔다. 결국 백화점은 지나칠 수 없는 통과의례다 이건가.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식사하러 들어간다. 입구에 있는 메뉴를 보며 이거먹자 저거먹자 한참 의견을 나누며 광분하던 구라 세자매가 메뉴에 찍힌 상호는 보지 않아, 안쪽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해프닝도 연출해 주시고 참 따라다니기 힘들다. 다행이 식사로 나온 밥이 조금 짜기는 했지만 꼭 갈비찜 국물에 밥 비벼 놓은듯한 맛이라 한국음식을 먹는것 같아 좋았다. 누들은 그저 그랬지만. 대도시에 들어왔더니 돈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쇼핑에 식사에, 이 곳에서 만큼은 절약은 안녕이다.

 

 

 그렇게 먹고도 구라 세자매와 용만이는 맥을 부르짖으며 카르푸로 간다. 저 대단한 집념. 스페인이다 보니 카르푸 내 한코너가 하몽으로 도배되어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구경만 할 줄 알았는데 또 필요한 것이 있다며 물건을 산다. 끝없는 쇼핑. 그러고는 식사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먹는다. 여자들은 암만 배불러도 케이크 들어갈 배는 따로 존재한다던데, 이 사람들은 햄버거 들어갈 자리도 따로 있나보다.

 

 카르푸를 나오니 시간은 벌써 5시를 넘어가고 있다. 쇼핑하는거 따라 다닌걸로 이미 체력은 방전됐다. 이날 걸은 거리를 따지면 다른 날과 다른게 있을까? 편히 쉬겠다고 12km 남기고 푸엔떼 비야렌떼에서 하루 묵고 온건데, 어째 다른날보더 더 피곤한거 같다.

 

 구라 세자매는 저녁 생각 없다며 대성당을 구경하겠다고 가고 체력 방전된 난 도저히 안되겠어서 알베르게로 쉬러 간다. 백화점에서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소화누님이 알베르게에 안계신다. 쉬면서 저녁때까지 기다려보지만 여전히 안돌아오신다. 어디가신거지?


“더 기다리면 알베르게 문닫는 시간 때문에 안될것 같은데요. 우리끼리 가죠”

“어머니하고 소화씨도 그렇고 민호도 그렇고 다들 식사 안했을텐데...”


 아버님이 다른 사람들 걱정을 하신다. 그런데 아버님, 아버님이 굶으면 굶었지 그 사람들 절대 굶을 사람 아니거든요. 오히려 우리보다 잘 먹으면 먹었지. 소화 누님이 말씀한게 있다. 집게손가락 하나면 모든게 해결된다고. 말 안통해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원하는 곳에 갈수 있고, 원하는거 먹을수 있다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같은 소화누님도 그런 말을 할정도로 이제 스페인에 적응했는데 무슨 걱정을.

 

 

 용만이와 아버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걷다보니 대성당 앞까지 와버렸다. 대성당 앞 카페테리아에서 여성 동지들 모두 케이크에 커피를 먹고 있는게 보인다. 어머니와 소화누님은 그렇다치고, 구라 세자매는 배부르다고 저녁 생각 없다더니 케이크는 잘만 먹고 있다. 역시 언제나 구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또 이렇게 다 모이냐. 이건 뭐 어디 가나 만나게 된다.

 

 마땅히 끌리는 식당도 없고, 어차피 용만이와 아버님 그리고 나만 저녁을 먹을거니 그냥 좋은 bar 찾아가서 타파스로 배 채우기로 한다. 맥주 생각이 났는지 따라가겠다고 한 보아는 전대를 놓고 왔다며 알베르게에 돌아갔는데 도통 나타나질 않는다. 알베르게 가니까 맘이 변했나. 아니면 길을 못찾고 헤매고 있는건가?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현정누나와 지영이가 보아아게 bar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해서 믿고 그냥 이동한다.

 

 Bar Madrid. 레온에서 마드리드 이름의 술집을 들어가다니. 나이가 좀 되는 분들만 계셔서 고급 bar가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나 비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맥주와 타파스가 정말 제대로 된 맛을 내준다. 특히 하몽은 비싼만큼 스페인에서 먹어본 것 중에서 단연 최고다. 쓸때는 쓰면서 즐겨야 나중에 후회가 없는 법. 술값으로는 상당히 무리하기는 했지만 추억에 남을만큼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안오나보다 하고 우리끼리 잘 즐기고 알베르게로 돌아갔는데, 알베르게에 보아가 없다. 설마 길이 엇갈린건가. 용만이는 걱정이 된다면 말릴사이도 없이 찾으러 뛰어나간다. 보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 걱정하는 마음과, 이럴때 흩어지면 일만 커지고 더 상황이 악화된다는 이성이 싸운다. 용만이가 안갔으면 내가 나갔을텐데, 용만이가 먼저 나갔으니 믿고 기다릴 수밖에. 제발 아무일 없기를... 그런데 현정 누나 왜이렇게 침착하지. 동생이 사라졌는데 별로 걱정을 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에 생각이 미친다. 보아도 그렇고 현정누나도 핸드폰이 있으니 정말 무슨 일이 있다면 연락이 있었을 거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보아가 돌아온다. 우리를 찾아가다 길을 잃어서 그냥 아무 bar나 들어가서 축구 경기 구경하다 왔다나. 찾아나선 용만이만 불쌍하게 됐다.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냐.

 

 다행히 용만이도 금방 돌아와서 밤중에 쇼는 쉽게 종료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용만이를 보자 보아가 너무 고마워 한다. 가족 이외의 사람이 이렇게 자기 걱정을 해준다는거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기나긴 하루가 끝나나 했더니 수녀님이 오시더니 축복 시간이라나, 미사가 있다고 알려주신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묵으면서 미사에 참석을 안하기가 뭐해서 성당으로 다 몰려갔는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미사를 진행한다. 모든 진행이 스페인어인데 왜 영어 버전 가이드 북이 있는 건지...어디를 하는지 찾지도 못하겠는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그냥 멍하게 앉아만 있다가 왔다. 미사가 끝나고 돌아오자 바로 소등이다.

 

 오늘 하루 정말 길었다. 조금 걸어온 레온인데, 전혀 쉬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평소보다 더 힘든 하루였다. 오늘의 교훈. 여자들과 절대 절대 쇼핑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