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10월 17일 일요일
떼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엘 부르고 라네로 (El Burgo Ranero) 30km
베드벅 때문에 못잘줄 알았는데 간지러운 가운데도 어떻게 잠은 계속 온다. 이 알베르게는 쉴 공간이 없기 때문에 먼저 일어나봐야 갈 곳이 없다. 더구나 랜턴도 잃어버렸고, 추워서 늦게 출발할건 뻔하고 그냥 침낭 속에서 뭉개며 늦잠을 자다 일어나보니 7시가 넘어있다. 방을 우리 일행 6명만 같이 쓰다보니 거리낌없이 불을 켜버린다. 전부 다 깨우고 짐 정리를 하고 랜턴을 찾아보지만 역시나 없다. 옛날의 나라면 한없이 화내고 짜증내고 그랬을텐데 나이가 먹어서일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놈도 지 갈 길 찾아간 거겠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보니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고, 구라 세자매는 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용만이와 같이 구라 세자매 자리에 동석을 했는데, 이런 줄을 잘못 섰다.
안쪽부터 식사를 주다보니 문가에 자리잡은 우리가 꼴찌다. 결국 용만이가 가서 뭐라고 한마디 하고 나서야 식사가 온다. 밥 아니 빵 한번 먹기 힘들다. 날씨가 쌀쌀해서 어차피 늦게 갈 거였지만 식당 아저씨 덕에 출발이 더 늦어졌다. 결국 9시 가까이 돼서 출발한다. 오늘 30km 정도를 가야 하는데, 이 시간에 출발했으니 5~6시는 돼야 도착할려나. 너무 늦게 도착해서 알베르게 자리 없는 상황은 맞고 싶지 않다.
마을을 벗어나자 또다시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이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라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을을 벗어날 때 뒤쪽에서 태양이 구름사이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산티아고 길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다보니 언제나 태양은 등 뒤에서 솟는다. 멋진 일출을 보기 위해서라도, 또 다른 멋진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길을 가다 틈틈이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바라봐야 한다. 아버님과 나는 일출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하염없이 전진하고 있다. 이 길을 앞만 보고 걸어가다니, 좀 더 즐기면 좋을텐데. 내가 이상한 걸까?
첫 번째 마을 모라티노스(moratinos)를 지나고 나서도 벌판길은 쭉 계속된다. 두 번째 마을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San Nicolas del real camino)에 들어서니 구라 세자매가 커피 마신다고 bar로 들어간다. 두시간 정도 걸었으니 한 8km 왔을려나. 쉬어갈까 하지만 자리도 비좁고 발이 괜찮을때 가능한 멀리 가는게 좋을것 같아 화장실만 보고는 어머니와 소화누님과 함께 바로 출발한다. 마을을 나오자 도로를 따라 고개를 향해 올라가는 직선길이 나온다. 출발은 분명 먼저 했는데, 경치 구경을 하면서 걸었다고는 고개를 다 올라가기도 전에 따라잡힌다. 여하간 구라 세자매, 힘들다면서 걷는건 무지 빠르다.
고개를 넘어가니 멀리 큰 마을이 보인다. 저기가 사하군(Sahagun)이겠구나 하는데 길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벗어난다. 뭐야, 저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야. 그럼 도대체 얼마나 더가야 사하군이 나올려나. 뭐, 가라면 가야지. 산티아고 길을 걷다보면 사람이 정말 단순해진다. 그냥 화살표가 가리키는데로 갈 뿐. 다른 길로 우회하거나 지름길을 찾을 생각같은건 안한다. 화살표를 따라갔더니 수선하고 있는 왠 허름한 교회 건물을 지나 다시 아까 본 마을로 길이 돌아간다. 뭐냐, 이것은. 이 달랑 한 채 있는 건물 보라고 이렇게 우회시키다니. 아까 도로를 따라 그냥 쭉 가버렸으면 벌써 사하군에 들어갔겠다.
사하군 구시가에 들어가니 일요일인데도 문을 연 식당이 있어 점심을 먹으며 쉬어간다. 지영이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구라 세자매는 13km 정도 떨어진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로, 나머지 일행들은 18km를 걸어 원래 목표 했던 엘 부르고 라네로 (El Burgo Ranero)로 가기로 한다. 헤어지는 거네. 신파극 다시 한번 찍어. 어차피 내일 또 볼게 뻔하다.
“승호야, 너가 따라와도 이 누나는 다 이해해줄게”
현정누나 또 장난 시작이다. 내가 미쳤나, 거길 따라가게. 따라가는 순간 현정누나가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 누구 때문에 왔어? 안봐도 비디오. 눈에 선하다. 내 무덤 팔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걱정은 된다. 순례자들이 잘 안가는 길을 여자 셋만 보내는게 마음에 걸린다. 용만이야 아버님 때문에 떨어질 수 없고, 민호라도 따라가면 좋으련만 이 녀석은 지영이를 너무 무서워한다. 따라가야 하나 갈등이 되지만 이미 용만이와 약속을 했다. 오늘은 저녁을 만들어 먹자고. 용만이 녀석이 솜씨를 발휘해 보겠다나. 뭐 고기만 구할 수 있으면 샤브샤브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데 한번 두고 봐야겠다.
점심을 먹고 사하군을 출발하는데 용만이가 이어폰을 꽂고는 질주를 시작한다. 너무 늦어 알베르게 자리가 없을까봐 먼저 가서 자리 잡겠다고 한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빨라도 너무 빠르다. 너무 무리하는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마을을 벗어나 조금 왔을때 비석으로 된 갈림길 표시가 나타난다. 길에는 오른쪽 다리 건너 가는 길이 큰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고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희미해서 잘 안보인다. 구라 세자매는 오른쪽 길로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 마을을 향해 가고, 나머지 일행들은 왼쪽 길로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로 이동한다. 오른쪽 길로 가는 순례자는 구라 세자매 밖에 안 보인다. 괜찮겠지. 그레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인데.
한동안 도로 옆에 난 길을 걷는데 완전 직선으로 쭉 뻗어있고 지평선이 좌우로 펼쳐진다. 도로라고는 하지만 차는 거의 안 지나다니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소리 뿐이다. 이런 길이 다음 마을까지 거의 10km쯤 이어진다. 나야 이런 길을 걷고 싶어서 온 사람이니까 좋지만, 민호는 죽을려고 한다. 아무것도 볼만한 것이 없고 변하는 것 없이 계속 같은 풍경이라서 너무 지친다나.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베르씨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마을에서 bar를 찾아 잠시 쉬어간다. 맥주를 시키는데 돈 계산하다 동전을 맥주잔에 빠뜨렸더니 동전 때문에 기포가 발생한다. 동전을 꺼낼수도 없고 그냥 한번에 쭉 들이켜 버렸다. 급한 마음에 맛도 제대로 못보고 그냥 마셨더니 왠지 손해본 느낌이다. 맥주를 다 마셔버렸더니 주인 아저씨가 삶음 달걀 반쪽에 붉은 피망 볶은걸로 토핑한 타파스를 공짜로 준다. 스페인 와서 처음으로 먹는 공짜 타파스라니... 용만이가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녀석 어디까지 갔을려나.
이제 남은 거리는 7~8km. 힘을 내서 마지막 구간을 걷는다. 아까와 같이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차이가 있다면 도로가 직선이 아니라 약간 곡선길이라는 점. 그래도 좌우로 보이는거라고는 지평선 뿐이다. 역시나 민호는 지친다고 아예 땅만 보고 걷는다.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을 지나치도록 알베르게를 못찾았다. 한바퀴 돌아보다 결국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자고 물어 물어 Albergue del Burgo Ranero, Domenico Laffi를 찾아갔는데 용만이가 없다.
“설마 아까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간 건 아니겠지?”
“설마요”
내 의문에 민호도 설마한다. 미리 자리 잡겠다고 날라간 녀석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베르게에 자리 맡아놓은것도 없고, 사람도 안보이고, 걱정이 된다. 뭔일 있는건 아니겠지. 잠시 뒤에 오신 아버님도 용만이가 없다는 것에 겉으로는 무슨일 있겠냐고 담담해 하시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게 눈에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부는데도 굳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을 입구를 바라보고 계신다.
“승호씨, 어머니하고 소화씨가 올때 됐으니까 마을 입구까지 갔다 올께요”
아버님이 마중을 나가시겠다고 하신다. 어머니하고 소화누님이 못 찾아올까봐 걱정이 되시기도 하겠지만 용만이 때문에 가만히 계시기가 힘드신것 같다.
마중나갔던 아버님이 어머니와 소화누님과 같이 오시는데 한결 편안한 얼굴로 돌아오신다. 용만이 찾았나?
“용만이가 누나들하고 같이 있다네요.”
지영이가 소화누님한테 전화걸어서 알려줬다고 한다. 설마 설마 했는데, 갈람길에서 길을 잘못들어 구라 세자매와 같은 곳으로 간 것이다. 길에 표시가 희미하기는 했어도 거의 모든 순례자가 왼쪽길로 오는데 지혼자 뭐할려고 오른쪽 길로 갔다냐. 과연 실수일까? 의도된걸까? 여하간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라니 안심이다. 한편으로는 여자 셋만 보낸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도리어 잘됐다 싶기도 하고...
“용만이도 남자라 이거지”
“마음은 여기 있는데 몸이 저절로 간거야”
그런거냐. 여자가 그리도 좋았더냐. 여기서도 어머니와 소화누님이 이렇게 농담을 하시는데, 구라 세자매에게 얼마나 당하고 있을지, 졸지에 아버지 버리고 간 불효자식 된 불쌍한 용만이다. 아주 자기 무덤 제대로 파고 누워주셨다. 흙은 내가 덮어주마. 어떻게 골려줄지 내일이 기대된다.
간만에 조리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는 알베르게, 더구나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원래는 용만이가 실력발휘를 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엉뚱한 곳에 가버렸으니, 오늘도 주방장은 어머니시다. 알베르게에서 찾은 고춧가루를 이용해 매운 참치찌개도 끓이고 볶음밥에 스프까지 제대로 밥을 해서 먹는다. 간만에 얼큰한 찌개를 먹으니 정말 살 것 같다.
“레온 이후에는 다들 자기 일정대로 가기로 해요”
이제는 여기 온 목적대로 자신을 위한 자기만의 여행을 해야 한다며, 소화누님이 운을 뗀다. 어머니와 소화누님은 일정을 맞추기 위해 레온에서 버스를 타고 어느 정도 이동할거라고 한다. 구라 세자매는 레온에서 하루 이틀 쉴 생각인것 같고, 나야 그냥 가던데로 갈거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레온 이후에는 팀이 갈라지겠구나. 이만큼 많은 인원이 여기까지 낙오 없이 같이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고, 정말 특이한 인연이다. 어차피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래놓고 레온 이후에도 같이 다니면....설마?
내일 저쪽팀은 오늘 적게 걸은 만큼 더 걸어와야 한다. 비유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째 조삼모사 같네. 지영이 발 상태 때문에 떨어져 간 곳인데 과연 내일 더 걸어오는게 괜찮을려나 걱정된다. 아니 올수나 있을까? 용만이야 죽어라 와야겠지만. 오늘 나랑 샤브샤브 얘기나 하지 말지. 이제는 구라 세자매가 아니라 구라 네남매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