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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고니* 2013. 3. 11. 12:37

 

10월 10일 (일요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to. Domingo de la Calzada) -> 벨로라도(Belorado) 22km

 다들 코골이 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고 잘 잤다. 코골이에 적응을 해가는 것일까 아니면 몸이 너무 피곤해서 못들은 걸까. 새벽 5시가 조근 넘자 어김없이 미영이가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덩달아 일어나 짐을 챙겨 식당으로 빠져나간다. 짐을 꾸리고 아침을 준비할려고 하는데 재료가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뭘샀는지도 모르는데 냉장고 안에는 비닐봉지가 여러개다. 결국 어머니한테 물어서 찾아내고 나니 이번에는 햄을 그대로 넣겠다는 건지 볶아서 쓰겠다는건지 용도를 모르겠다. 결국 우왕자왕하다 현정누나가 내려오고 나서야 아침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뭐든지 일은 시작한 사람이 끝내야지 엉뚱하게 중간에 넘겨받으면 문제가 생긴다.

 

 용만이가 가지고 온 선식에 아침에 엉터리로 끓인 스프에 샌드위치등 오늘도 잡다한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7시쯤 출발하는데 어제 비가 와서인지 날씨가 꽤 쌀쌀하다. 오늘도 발 상태가 안좋아 꼴찌로 천천히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거리를 지나 다리를 건너 다리 밑으로 내려갔을때 갑자기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표시가 나타난다. 어두운 상태에서 표지를 못보고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앞에 가는 순례자 두사람이 표시를 못보고 그냥 쭉 앞으로 나아간다. 저 멀리서 현지인이 그 길이 아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일행중에도 이 길을 잘못 들어갔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민호가 나타난다. 일행과 떨어져 걷다 표지를 못보고 그냥 앞으로 쭉 걸어갔었다고 한다. 왜 불안한 감은 정확히 맞는지. 그나마 빨리 되돌아 왔으니 다행이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교차로가 나왔는데 표지가 안보인다. 앞으로 가면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라가고 왼쪽길로 꺽어지면 멀리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앞뒤로 순례자도 보이지 않는다. 표지가 없으면 직진이겠지하며 그냥 다리르 건너 언덕위로 올라갔는데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직선으로 쭉 펼쳐진 길 위에 인적이라고는 없다. 아무리 내가 뒤쳐졌다고해도 순례자 한두명은 보여야 하는데 이게 뭐지? 뒤돌아 보니 한참 뒤에서 오던 순례자들이 아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마을로 가는게 보인다. 이런...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왕 높은 곳에 올라온거 사진을 찍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한다.

되돌아가보니 땅바닥에 자갈을 모아 화살표를 만들어 놓은 것이 구석에 있다. 보통은 자갈도 노란색으로 칠해 눈에 띄게 만드는데 여기는 그냥 모양만 만들어 놓았다. 새벽에는 민호가 길을 잃더니 오전에는 내가 헤매고, 이게 뭔지. 그나마 민호는 어두워서 그렇다치지만, 난 해도 다 떠서 환한데도 못보고 지나쳤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라뇬(Graňon) 마을로 들어가니 첫 번째로 보이는 가게 앞에 소화누님과 민호가 앉아있다. 다른 이들은 이미 갔는지 안보인다. 아침에 처음 연 bar나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잔을 하는게 이제는 일상이 되버렸다. 오늘도 커피 한잔을 하고 길을 다시 나선다. 쉬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면 언제나 발이 안좋다. 조금 걷다보면 고통에 익숙해지고 발도 조금 풀리면서 속도가 다시 난다.

그라뇬 마을 이후부터는 벨로라도 도착할때까지 2~3km 마다 마을이 계속 나온다. 벌판을 가로질러 40-50분 가면 마을이 나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쉬어가기도 괜찮다. 두 번째 마을을 지나 세 번째 마을로 들어갈때쯤 구름이 멋지게 펼쳐지는데 역광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마을에 들어서니 bar 앞에 정호씨와 일행들이 모여 있다. 파울료 코엘류 관련 자료로 꾸며진 곳인데 크루스 데 페로(Cruz de ferro)에 가져갈 돌을 나눠준다. 내 배낭무게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데 돌까지 이고갈 생각은 없다. 크루스 데 페로가 나에게 의미있는 곳도 아니고. 다음 마을까지 3km 정도라고 정호씨가 알려준다. 지금이 11시니까 12정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할테니 거기서 점심을 먹으면 된다는 계산이 서서 화장실만 보고는 바로 출발한다. 마을을 벗어나는데 바람이 거세게 분다. 점퍼를 세탁할때가 됐다 싶었더니 아주 아낌없이 입어주라고 정말 거세게도 불어주신다. 점퍼를 꺼내 입고 후드까지 덮어쓰고 완전 중무장을 하고는 걷는다. 햇볕이 내리쬘때는 정말 강렬한데 반대로 구름이 끼어 흐려지면 의외로 서늘하다 못해 춥고 바람까지 불어주면 시릴 정도로 스페인의 체감온도는 극과 극으로 왔다 갔다 한다. 마을을 벗어나서 벌판을 가로지른 후부터는 벨로라도까지 도로를 따라 옆에 난 흙길을 계속해서 걷게 된다.

 

다음마을로 가는 중간에 갑자기 뒤에서 민호가 빠르게 걸어온다. 분명 나보다 한참을 앞서 갔었는데 왜 뒤에서 나타나지 의아했는데 배낭까지 바뀌어 있다.


“어떻게 된거야? 그 배낭은 뭐고”

“소화선생님꺼에요. 선생님이 힘들어하셔서 가지고 온건데...”

“네 배낭은 그럼 어떻하고...”

“저번 마을에 놓고 갔다왔는데, 용만이형이 제 배낭까지 메고 갔데요”


헉, 이게 뭔 소리여. 발도 안좋은 녀석이 소화누님 배낭 들어주겠다고 되돌아갔다오고, 용만이는 자기 배낭에 그 무거운 민호 배낭까지 들쳐메고 갔다니.


“소화누님은 어디계시고?”

“뒤에서 오고 계세요”


 민호는 그 말을 남기고 정말 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걸어간다. 자기 배낭을 용만이가 가져갔으니 미안한 마음에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인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발상태가 안좋은 녀석이 너무 무리하는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io)에 들어왔는데, 처음 나타난 bar가 산티아고 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어 그냥 지나쳤더니 바로 마을 밖으로 빠져나온다. 배낭을 메고 오래걷다보면 조금이라도 덜 걷고 싶어진다. 산티아고 길에서 벗어난 곳으로 왔다갔다 하는것도 싫어지고, 뒤로 후진하는건 생각도 안한다. 무조건 전진이다. 밥 먹을 장소를 찾지 못해 그냥 계속해서 걸었더니 벨로라도까지 쉬지 않고 쭉 와버렸다.

 

 벨로라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알베르게겸 식당이 있는데 야외 테라스에 용만이와 민호, 지영이, 보아, 현정누님이 쉬고 있다. 민호가 중간에 따라잡았나 궁금했는데 벨로라도까지 용만이가 배낭을 다 메고 왔다고 한다. 나중에 발을 보니 새끼발가락 전체가 물집인데도 군장무게보다 가볍지 않냐며 웃어버린다. 아들이라 쓰고 머슴이라 읽는다고 농담할 정도로 짐꾼 노릇에 이력이 났다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다. 민호가 짐승이라면 용만이는 괴물이다.

 

 다른일행을 기다리며 아침에 싸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아버님과 어머니는 금방 오셨는데 소화누님은 다들 되돌아가봐야 하는거 아닌가 걱정을 할때쯤 되어 나타나신다. 아버님과 어머니가 소화누님과 같이 오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들이 알베르게 자리를 잡으러 먼저 벨로라도 시내로 들어간다.

 

 쉬었다 걸으면 발상태가 다시 굳어져 걷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시내로 들어왔을때 앞에 간 일행들을 놓치고 말았다. 알베르게 표시는 여러개가 보이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 내 자리까지 다 맡아놨을텐데 그냥 아무데로 들어갈수도 없고, 이걸 다 뒤치고 다녀야 하나 고민된다. 일행들과 헤어질 궁리만 하던 놈이 이제는 일행들을 찾아다니게 생겼으니 꼴이 우습게 됐지만, 수가 없으니 어쩔수 없다.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확인하며 가다보니 세 번째 알베르게에서 일행들을 찾았다. 아침에는 길 잃고 헤메고, 점심은 먹을 자리 못 찾아서 뒤늦게 다와서 먹고, 일행들 찾아 알베르게 뒤지고, 오늘 뭔가 마가 씌었나.

 

 그런데 진짜 마가 씌었는지, 세탁후에 또다시 문제가 생겨버렸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1대씩 있고 관리인에게 문의하라고 안내가 붙어 있어 샤워를 하고나서 일행들의 빨래감을 모아서 가져갔는데 관리인이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무작정 기다릴수 없어 우선 세탁기를 돌린것까지는 좋았는데 건조기가 작동을 안한다. 빨래감은 다 젖어서 축축한데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마를것 같지는 않고 건조기가 작동을 안하면 내일 짐을 싸서 가는데 골치 아파진다. 전부 스페인어로 써져 있지만 버튼이 달랑 3개니 조작법 조합이야 몇 개 안돼 뻔한데도 작동이 안된다. 뒤를 보니 콘센트는 제대로 꽂혀 있는데 아무리 눌러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다들 건조기가 고장난것 같다며 포기하고 그냥 젖은 빨래를 챙기려는데 설마하는 생각이 든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탁기와 건조기의 콘센트를 빼서 서로 바꿔 꽂아 보았다. 그랬더니 세탁기는 전원이 안들어오고 건조기가 작동이 된다. 기계는 멀쩡한데 전원쪽이 애초에 끊어져 문제가 있었다니 황당하다. 어쨓든 건조기가 작동하니 보아가 한마디로 평한다.


“오빠 생존력 짱이다.”


 이게 생존력이 좋은건지 어쩐지는 모르겠고 여하간 문제 하나가 해결되서 기분은 좋다.

 

 배낭을 들어준 민호와 용만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소화누님이 두사람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하신다. 덩달아서 나머지 일행들도 다같이 나가서 사먹기로 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광장 주변으로 식당과 바가 여럿 있는데 소화누님이 고른 레스토랑은 7시부터 저녁이 된다고 한다. 시간 여유가 있어 그때까지 쉬기로 하는데 다들 힘들었는지 나가는 사람이 없고 대부분 침낭 속에 누워버린다.

 

 잠시 누워있어야지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보아가 흔들어 깨워줄때까지 정신모르고 잤다. 레스토랑에 가보니 1층은 bar고 2층이 식당으로 되어 있다. 용만이는 bar에 깔려있는 타파스를 보자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충분한 양의 맥주와 하몽을 위해 산티아고 길을 따라왔다는 놈이니 말 다했다.

 

 오늘도 샐러드를 시켰는데 리오만 못하다. 밥이나 스프등 다른 사람들이 시킨 메뉴는 괜찮았는데 음식 선택을 잘못했다. 주요리로 폭찹을 시켰는데 뼈다귀만 많고 기대했던 폭찹과는 거리가 너무 먼 음식이 나온다. 뭐가 다 어긋난 하룬지 메뉴 선택에서도 완전히 실수했다. 저녁식사를 어느 정도 했을때 정호씨가 식당에 들어온다. 잠시 후에는 카를로스와 루이스 일행까지, 식당에서 아는 얼굴을 많이도 만난다. 우리가 사람들을 잡아끄는 걸까 아니면 갈곳이 마땅치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는걸까.  

 

 식사후 남자들만 자리를 옮겨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한다. 일요일답게 bar마다 사람들로 들어차 앉을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안주로 먹은 홍합맛은 한국과 별반 다를게 없다. 해산물은 어딜가나 비슷한거 같다. 알베르게로 돌아오자 하나 둘 기절하듯 쓰러져 잠든다. 바람 불고 쌀쌀한 날이다 보니 술먹고 열내야 한다고 다들 식사때 포도주를 많이 마셨는데 술의 힘을 빌려서인지 다들 빨리도 취침 모드에 돌입한다. 오늘도 어제처럼 아무소리 못듣고 그냥 푹 잘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