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0월 6일

*고니* 2013. 3. 11. 11:15

 

 10월 6일 (수요일)

에스테야(Gares-Estella)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오늘도 일어나보니 5시다. 이런건 틀리지도 않는다. 식당에 내려갔지만 전등 스위치를 찾을수가 없다. 한참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2층 자리로 올라와 침낭속으로 들어갔는데 잠시후 미영이가 일어나 짐을 싸는 소리가 들린다. 미영이도 너무 부지런하다.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어차피 잠자기는 글렀다.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해 짐을 전부 가지고 식당으로 내려간다.

 

 식탁 의자에 짐을 널려놓고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알베르게 할아버지가 아침 준비를 하러 오신다. 불이 들어온 건 좋은데, 이 할아버지 짐 빼라고 뭐라 하는데 알아 들을수가 없다. 아니 짐 싸는거 안보이시나. 식당에 나 혼자고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는데 식탁도 아니고 의자에 짐 좀 널려놨다고 왜 이리도 성화인지 모르겠다. 난 산티아고 길에서 알베르게 운영하시는 분들은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격들인 줄 알았는데 이분을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할아버지가 음식을 내오는데, 비스켓과 딱딱하게 굳어있는 네모란 빵조각, 버터, 잼이다. 커피와 우유는 큰 통에 따라 데워져 있어 각자 알아서 따라 마시면 되고, 코코아 가루 같은 봉지도 따로 있다.

 

 할아버지가 음식을 다 내오기도 전에 짐을 다 꾸려서 배낭을 식당 한쪽 구석에 세워놨는데, 이 할아버지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배낭을 식당 밖으로 빼라고 난리다. 한쪽 구석에 있는 배낭이 길을 막는것도 아니고, 자리 차지하는것도 아닌데 왜 저러시는지... 짜쯩이 묻어있는 얼굴로 뭐라 말하는데 알아듣지는 못해도 기분은 무지 나쁘다. 저분 나한테 무슨 악감정 있나? 아니 내가 아니라 동양인을 싫어하시는건가? 음식도 차가운 것 뿐인데, 할아버지 때문에 기분까지 나쁘니 소화불량이나 안걸릴지 모르겠다.

 

 아침에 삶은 계란이라도 만들어 먹자고 계란을 넉넉하게 샀는데, 어제 수제비와 파전을 해먹고도 계란이 12개나 남아 있다. 놔두고 가기도 뭐해서 용만이가 스크램블도 만들고 계란 후라이도 하는데 그 할아버지 또 뭐라고 하신다. 혼자서 후라이팬 계속 쓰고 있다고. 아니 12명분 요리를 하는데 어떻하라고. 우리일행에 어제 여성3분까지 식당에 자리잡은 한국인만 12명인데, 식당에 있는 외국인 전체 인원보다 우리가 많은데 뭘 어쩌라고. 정말 인정머리라고는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느긋하고 느리다고 하는데 이분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성질 한번 급하다 못해 어르신에게 할말은 아닌줄 알지만 드럽다.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날때쯤 스페인 할아버지 2분이 식당에 들어온다. 카를로스와 루이스. 숙박하는 곳은 달랐지만 같은 일정으로 걷다보니 하루에 한두번 이상은 마주치게 되서 인사를 몇 번 했던 분들이다. 언제나 카를로스가 스틱 앞부분을, 루이스가 그 스틱 끝부분을 잡고는 일렬로 걸어가서 눈에 띄던 분들이다. 내가 ‘올라’하고 인사하며 지나치면 언제나 카를로스가 루이스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수 있는 단어는 ‘코레아노’라는 것 뿐이었다. 왜 그러는지 몰랐다가 이날 아침에 알았다. 카를로스가 루이스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혀주고 접시, 포크, 나이프등을 루이스 앞에 셋팅해준다. 그리고 음식들의 위치를 루이스에게 알려준다. 루이스가 앞을 못본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모든게 이해가 된다. 내가 인사하고 지나가면 방금 인사하고 지나간 사람이 한국인 남자라고 카를로스가 루이스에게 설명을 해준거였다

 루이스 옆에 앉아 있던 현정누나가 그걸 보고는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얘기를 건낸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그건 루이스 몫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나중에 보니 루이스를 싱크대 앞에 데려가 세제 위치 등을 알려준 후에 카를로스가 식기류를 가져오면 루이스가 그것을 닦는다. 당연히 시간은 더 걸리지만, 그렇게 각자 일을 분담하므로써 카를로스는 루이스를 불쌍한 장애인이 아닌 자기 몫을 하는 한 사람으로 대한다. 우리는 장애인이라면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두분은 장애는 그냥 조금 불편할 것일뿐이라고 직접 행동으로 말하고 있다.

 

 이 실수(?)로 현정누나는 카를로스, 루이스와 친해져 나중에 이분들에 대해 많은걸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형제지간인줄 알았던 카를로스와 루이스는 20대 중반에 만난 친구로 올해로 40년이 넘는 우정이라고 한다. 루이스 배낭에 매달린 가리비 조각에는 루이스가 산티아고 길을 처음 걸었던 1995년부터 마지막으로 걸었던 2006년까지 총5개의 년도가 적혀있다. 루이스는 2005년에 눈이 완전히 멀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눈먼 친구를 위해 카를로스가 길잡이로 처음 산티아고 길을 왔다고 한다. 과연 내 눈이 멀었을 때 내 친구는 나를 이끌고 이 길을 함께 걸어줄 수 있을까? 아니 반대로 내 친구가 장님이 되었을 때 난 그 친구를 위해 이 길을 함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인생에서 3명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산거라고 한다.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 내가 힘들때 함께 해줄수 있는 친구,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연인. 카를로스와 루이스는 친구에서만큼은 성공한 인생이리라. 알베르게 할아버지 때문에 짜증났던 가슴이 카를로스와 루이스 때문에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동도 트지 않아 어두운 아침. 그러나 시간은 벌써 8시에 가까이 가고 있다.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 앞에 나와 일행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앨빈이 인사를 하고 먼저 출발한다. 큰 배낭을 매고 가볍게 걸어가는 앨빈의 뒷모습을 보고 현정누나가 한마디 한다.


“너 걷는 모습이 저래”


뭔 소리지?


“큰 배낭을 메고도 참 가볍게 걷더라. 뒷짐까지 져가면서”


내가 뒷짐지고 걷는게 가볍게 보였다니, 이 누나가 단단히 착각했다. 난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다. 손에 뭘 들고 있는것 자체가 체력을 깎아먹기 때문이다. 보통 배낭은 무게를 어깨로만 지탱하면 힘이 들기 때문에 허리에서 받쳐줘 무게를 분산시키는데 내가 너무 마른체형이다보니 아무리 조여도 허리에서 받쳐주지를 못한다. 당연히 배낭의 모든 무게는 어깨로 전해져 내리누르는데, 어깨도 살이 없다보니 한동안 걸으면 어깨가 너무 아파온다.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배낭을 떠받치기 위해 뒷짐을 지고 걷는건데,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편하면 뒷짐까지 지고 걷나 싶었던가 보다. 난 어깨가 빠질듯 아파 죽겠는데...

 

 일행들이 다 나와서 출발을 하는데 왼쪽 발목이 아파온다. 오른쪽 발은 엄지발가락 감각이 이상하고... 어제 조금 무리하는것 같은 느낌이더니 잠자고 나니 바로 반응이 온다. 빨리 걷고 싶어도 그러기에는 몸 상태가 별로다. 이럴때 무리하면 바로 탈나서 뻗어버린다. 속으로 무리하지 말자, 무리하자 말자 되새기며 발 상태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 사이 일행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가 돼서 조용하게 걷는 기분도 나름대로 괜찮다. 알베르게가 있는 구시가를 나와 신시가지로 올라가는 중간에 카미노 표지를 잃어버렸다. 앞에 가는 순례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그들도 표지를 잃고 헤매고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표지를 찾지만 표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길 건너 반대편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언덕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계속해서 잘 올라가는 것이 길을 잃은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길 건너 뒤따라서 올라가니 내 앞에서 길을 잃었던 순례자들도 덩달아 뒤따라온다.

 

 산티아고 길을 걷다보면 가끔씩 길을 잃고 헤맨다. 재미있는건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다가, 같이 걷는 일행이 있거나 앞에 가는 다른 순례자를 따라갈 때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 사람이 혼자가 되면 긴장을 하기 때문에 작은 표시하나 놓치지 않는데,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고 안심하면 큰 화살표 표시도 못보고 지나치게 된다. 내가 안봐도 다른 이가 보겠지 하는데 그 사람 또한 똑같은 생각을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건 길을 잃고 헤매는 곳은 언제나 도시라는 거다. 시골동네나 들판, 산길에서는 길이 뻔하다보니 표시가 없어도 당황하지 않는데, 도시는 워낙 갈림길이 계속 나타나다 보니 조금만 표시가 안보여도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불안해진다. 그래서일까 산티아고 길을 오래 걸으면 걸을수록 시골동네가 더 친숙해지고 도시에 들어서면 뭔지 모를 낯설음이 느껴진다.

 

 반대편으로 건너가니 표시가 나타난다. 신시가 언덕을 넘어가는데 도시를 둘러싼 산 너머로 구름들이 붉게 물들어온다. 조금 있으면 산위로 해가 뜰것 같다. 일출을 잘 보기 위해 언덕 꼭대기까지 돌아 올라가는 사이 해가 완전히 떠버렸다. 아깝게 일출 장면을 놓쳤다. 그래도 붉게 물든 구름이 펼쳐져 있던 풍경만큼은 아름다웠다.

 

 신시가 외곽을 내려가 도로를 건너 다시 산쪽으로 길이 이어지는데, 언덕을 조금 올라가자 길 옆에 건물이 있고, 철창으로 둘러쌓인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는게 보인다. 뭐지 하고 다가가보니 앨빈이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유명한 와인 나오는 수도꼭지, 이라체 수도원이다. 여기가 이라체라니, 당혹스럽다. 책에서 봤던 사진들은 수도꼭지 나오는 부분만 크게 찍어놔서 주변 경관을 알수없었지만, 그래도 그 유명한 수도원인데, 마을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교회 건물같은걸 상상했었다. 그런데 실제는 에스테야 외곽을 벗어나자마자 산길 옆에 덩그러니 나타나는 그저 그런 석조건물이라니... 이라체 부근에서 숙박하면서 와인이나 잔뜩 마셔볼까도 생각했었는데 이라체 근처에는 숙박할만한 곳은 고사하고 건물도 몇채 없다. 내 멋대로 상상하고 이런 곳에서 머물려고 했었다니 기가 막히다. 어제 에스테야에서 멈추기를 정말 잘했다.

 수통의 물을 버리고 와인을 받아서 맛을 본다. 잔뜩 기대했었는데, 이런 와인 맛이 너무 떨떠름하다. 와인을 잔뜩 받아갈려고 했었는데 이런 맛이면 차라리 슈퍼에서 1, 2유로짜리 와인을 사마시는게 더 낫겠다. 결국 수통을 다시 물로 채운다. 이라체 수도원에서 수통을 와인이 아닌 물로 채워가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려나...

 

 수통에 물을 받아 나오는데 일행들이 이라체 수도원으로 오는게 보인다. 아니 내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완전히 앞질러 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된거야? 앞서도 한참을 앞서 갔어야 되는데, 천천히 걸어온 나보다 더 뒤에 오다니 말이 안된다. 어떻게 된건지 들어보니 이런 아까 나처럼 앞에 가는 순례자를 따라가다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가 되돌아왔다나. 그런것까지 똑같이 하는건 뭐야.

 

 이라체 수도원에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좀 더 돌아가기 때문에 언덕 옆으로 우회하는 길보다 몇 km 더 걸어야한다. 일주일째 계속 걷다보니 다들 발에 무리가 와서 조금이라도 적게 걷겠다고 언덕 옆으로 난 길로 간다. 발상태가 나 역시 안 좋지만, 높은 곳에서 전경을 보고 싶은 마음에 홀로 산길로 올라간다. 어차피 나는 로스 아르코스에서 멈출 생각이 없는데 일행들은 그걸 고려하고 있으니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산길로 올라가는 순례자가 거의 없다 보니 너무나 조용하다. 조용한 산길을 홀로 걷고 있으려니 이러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조난당하는거 아냐 하는 망상도 들면서 겁도 조금 나지만, 이제야 홀로 나만의 시간을 갖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든다. 발목이 안좋다보니 보통때보다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누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순례자인가 뒤돌아보니 이런 아버님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게 보인다. 반가우면서도 오늘도 역시나 난 혼자일수 없는가 하는 허탈감이 같이 몰려온다. 다행히 아버님도 높은 곳에서 경치 구경을 하기 위해 홀로 올라오신거라서 빠르게 지나쳐 가버리신다. 내 발이 안 좋은 상태라지만 64세라는 연세가 안 믿길 정도로 정말 잘 걸으신다.

 

 아버님을 먼저 보내고 산길을 혼자 걷는다. 적막함, 고요, 그 자체를 즐기며 올라가는데 숲이 끝나면서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맥 위에 병풍처럼 솟아있는 절벽들이 너무나 절경이다. 그 위에 펼쳐진 파란 하늘하며, 너무나 멋진 경치에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다.

 산길을 돌아 내려와 다시 올라가는 고갯길. 고개 꼭대기에 도착할 때 바로 뒤에 네덜란드 역사 선생님이었다던 할아버지가 올라오신다. 다들 안오는 길을 어떻게 연세 많은신 분들만 오시는지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잘 걸으시고 정말 대단하시다.

 고개 꼭대기에 서니 다시 새로운 전경이 펼쳐진다. 쫙 펼쳐진 벌판과 푸른 하늘 그리고 각가지 문양을 만들어내는 하얀 구름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경이다.

 

 풍경에 취해 있다 보니 어느새 산길을 다 내려와 고속도로를 따라 옆으로 난 길을 걷는다. 고속도로를 오른편에 두고 걷다가 고속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지나 고속도로 반대편에 나 있는 길과 만난다. 지영이가 길이 다시 합쳐진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여기가 갈림길이 합쳐지는 지점인가보다. 반대편에서 오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일행들은 여기를 지나쳐 앞에 가고 있을까 아니면 뒤에서 오고 있을까? 일주일째 보다보니 정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일행들 생각을 한다. 뭐 인연이 계속된다면 또 보게 되겠지.

 

 발목 통증에 절뚝거리며 천천히 길을 계속 걸어간다. 조그만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길은 넓게 펼쳐진 들녘을 가로질러 끝없이 이어진다. 마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다음 마을까지 9km라는 표지만 보인다. 9km면 대충 2시간인데... 산길을 내려올 때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bar가 보이지 않아 쉬지 않고 통과했었다. 이라체 수도원에서 딱 한번 쉬었을 뿐 계속 걸어왔는데, 이대로 2시간을 더 갈수 있을까? 분명 쉬어가야 하는데 앉아서 쉴만한 공간은 고사하고 나무 그늘조차 없다. 보이는 거라고는 들녘과 포도밭,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흙길뿐. 걷다보니 드문드문 보이던 순례자들도 안보이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차의 소음도 새소리도 심지어 바람소리조차 없는 완벽한 고요 속을 걸어간다. 들리는 거라고는 내 발걸음 소리뿐이다. 인적이 없는 길을 혼자서 명상을 하면서 걷고 싶었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자 명상이 아니라 망상이 든다. 발목이 안좋고 걷기는 너무 힘들고, 일행은 고사하고 인적은 없고, 내가 여기서 뻗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죽고 나서 몇일 후에 발견되는거 아냐. 홀로 있다는 두려움, 나 자신을 챙길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그 상황이 억지로라도 계속해서 걷게 만든다.

다시금 표지가 나타난다. 다음 마을까지 5km. 이제 한시간 거리다. 어차피 쉴 곳은 없다.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하며 계속 걸었는데 마을은 보이지 않고 발목은 점점 더 아파온다. 저기 보이는 곳까지만 가서 쉬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기를 몇 번. 진짜 이제는 더 이상 못갈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기 멀리 보이는 언덕 위까지만 가자. 저기서도 마을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매트리스 깔고 자버리자. 그렇게 다짐하며 아픈 발을 이끌고 마지막 힘을 내서 올라가니 언덕 아래로 마을이 보인다. 진짜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마을이 보이니, 더 이상 갈 힘이 없을줄 알았는데 없던 힘이 생긴다. 결국 마을까지 계속 걸어간다.

 

 마을 입구에 가까이 가자 보이는 지명 Los Arcos. 쉬지 않고 걷느라 어디쯤 왔는지도 몰랐는데, 1시도 안되서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한거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벤치에 아버님이 쉬고 계신다. 아버님도 쉴 곳이 없어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오셨다고 하신다.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산길로 돌아왔기 때문에 거리상 차이가 많이 있으니, 일행들이 앞에 가고 있는지 뒤에서 오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멈추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으니 도착했다면 남아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안보이는걸로 봐서는 아직 못온것 같지만 리오까지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 이제 겨우 1시인데 멈추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르다. 가지고 온 과일로 점심을 해결하고 먼저 리오를 향해 떠난다. 아버님은 용만이와 같이 가야하기 때문에 무작정 출발하실수가 없다. 2시까지는 기다려보고 안나타나면 먼저 간 걸로 알고 리오로 따라오시겠다고 하신다. 용만이는 누나들과 헤어지기 싫어할테니 여자들이 남는다면 용만이도 따라 남을테고, 아버님도 같이 남게되겠지. 이제 진짜로 혼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입구만 봤을 때 로스 아르코스는 무척 작은 동네로 생각했다. 조금만 가면 마을을 벗어나 다시 들녘이 나올줄 알았는데, 길은 구시가를 통과해서 신시가를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다. 12km가 넘는 황량한 벌판길을 쉬지 못하고 걸어오기 때문에 로스 아르코스에서 쉬게 일정을 잡는줄 알았는데, 구시가에서 본 성당건물도 그렇고 로스 아르코스는 볼거리가 있는 상당히 큰 마을이었다.

 

 마을 중심, 구시가지에 있는 성당 앞을 지나치는데 성당 앞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순례자 두 명이 절뚝거리며 걷는 내게 괜찮은지 물어온다. 괜찮다고 웃으며 답하고 지나치지만 솔직히 전혀 괜찮지 않다. 그래도 계속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다. 누가 대신 걸어줄수도 없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쉬자는 마음과 그래도 갈때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 결국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산티아고 길 초반에는 사람을 만나고, 중반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후반에는 신과 조우하게 된다고 했던 용만이의 말이 떠오른다. 그럼 난 이제 내 자신과 만나고 있는 것일까?

 

 교회를 지나 조그만 다리를 지나면서 구시가가 끝나고 신시가지가 나온다. 신시가지에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간편한 차림으로 산보를 나오는 유스케가 보인다. 트랙킹이 취미라더니 나보다 늦게 출발했는데도 벌써 도착해서 마을 구경하러 나오는 여유라니, 유스케 체력이 부럽다. 리오까지 간다고 인사하고 유스케와 헤어져 신시가 언덕을 넘어가니 눈 앞으로 다시 벌판이 펼쳐지고 멀리 산등성이 부근으로 마을 2개가 보인다. 과연 어디가 리오일까? 앞쪽일까, 뒤쪽일까? 지금 발 상태로는 가까운 왼쪽 마을이 리오라면 좋겠다. 그런데 로스 아르코스에서 토레스 델 리오까지는 8km 정도 거리일텐데, 대충 눈으로 보이는 거리는 4~5km정도, 8km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그렇다면 역시 뒤쪽 마을인가? 그래도 마을이 눈에 보이니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는 희망에 길을 걷는다. 이날 알았다. 눈에 보이는 거리와 실제 거리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산티아고 길은 절대 최단거리 직선코스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에는 그래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씨에스타 시간대로 들어서는걸 깜박했다. 나무 그늘조차 없는 벌판길을 강렬한 햇볕 아래 걷는게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이때 절감했다. 강렬하다는 스페인의 태양, 정말 이날 제대로 느꼈다. 발목은 이상하고 과연 끝까지 갈수 있나 걱정이 밀려온다. 그나마 멀리 앞서 가는 외국인 할아버지를 보면서 저분도 걸어가는데 젊은 내가 못가겠어 하는 오기로 따라간다. 한참을 따라가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무 그늘이 하나 나타난다. 더구나 앉아 쉴 수 있게 돌로 된 벤치까지 있다. 저기서 쉬고 가야지 하는데 앞에 가던 할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둘이 쉬기에는 조금은 비좁기에 어쩔수 없이 그냥 지나쳐가는데 할아버지께서 초콜릿을 나눠주신다. 단 음식이 들어가니 기운이 조금 나는것 같다.

 

 계속해서 땡볕을 걸어가는데 분명 왼쪽마을을 향해 나있던 길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결국 저 멀리 뒤에 보이는 오른쪽 마을이다 이거지... 순간적으로 힘이 쭉 빠져버려 바로 옆 포도밭 그늘에 주저 앉아 버린다. 어떤 목표를 향해 죽어라 가고 있는데 갑자기 목표가 바뀌어 버릴때, 여태까지 뭐했나 싶으면서 밀려오는 허무감, 무력감 같은거, 그런 점에서 인생이나 여행이나 똑같다. 어차피 가야하고 갈 수밖에 없는 길. 잠시 쉰 후에 심기일전 다시 힘을 내서 걷는다. 그런데 도로가 나오면서 길이 도로를 따라 다시 돌아서 왼쪽 마을로 향한다. 뭐냐 이건, 뭔 길을 이렇게 빙빙 돌아가게 만들었는지 황당하면서도, 발목은 아프고 체력은 고갈 직전이다보니 제발 저 마을이길 간절하게 빌게 된다. 저기까지만 가자라는 정신력, 아니 이 뜨거운 햇볕에서 쓰러진다면 일사병으로 안녕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억지로 버티면 올라갔더니 산솔(SanSol)이다.

 

 산솔 다음이 토레스 델 리오라는건 기억이 나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앱을 켜보면 알수 있는데 배낭을 내려놓고 꺼낼 기운조차 없다. 기억이 안나니 벤치가 눈에 들어오자 바로 앉아버린다. 양말까지 다 벗어보니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있다. 왼쪽 발목이 안좋아 비딱하게 쉬지도 않고 걸었더니 결국 오른쪽에 탈이 났다. 아직도 씨에스타 시간이다보니 산솔에 인적이라고는 없다. 그냥 이대로 벤치에 누워서 자버리고 해 떨어지면 갈까. 쉬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밀려오지만 지금 쉬면 발이 풀려 더 이상 가지 못할거라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알베르게만 보여도 그냥 들어가 버리겠는데, 산솔에 하나 있다는 알베르게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억지로 일어나 산솔을 빠져나가는데 표지판에 내일 목적지 로그로뇨와 엉뚱한 마을 이름만 있고, 토레스 델 리오가 빠져있다. 내가 리오를 지나쳤나? 분명 산솔 다음이 리오인데... 뭔가 잘못된건가 싶어 배낭을 내려놓고 앱을 꺼내 확인을 해보니 이럴수가, 산솔에서 리오까지 고작 800m다. 바로 산솔 밑에 마을이 토레스 델 리오. 이게 뭔가 하는 허탈감과 이제 다왔구나 싶은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리오까지 가면 묵어가기로 했던 casa mariela를 현지인들에게 물어 찾아간다. 역시나 일행중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나 일행들과 우루루 침대를 점령했었는데 오늘은 나 혼자다. 숙박료 7유로에 아침 식비 3유로를 내니 식권 같은걸 주면서 아침에 제시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지정된 방을 찾아가니 전부 서양인이고 나만 동양인이다. 왠지 모를 낯설음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 져야겠지. 그나마 옆침대에 앨빈이 있고 대부분 걸으면서 봤던 얼굴들이라 서먹하지는 않다.

 

 언제나 샤워하러 갈때는 귀중품을 민호나 용만이에게 맡겼었는데, 혼자다 보니 다 챙겨서 샤워실로 가야한다. 여럿이 있을 때는 다 모아서 세탁기를 돌렸었는데 세탁도 손빨래를 한다. 일행이 있다가 혼자가 되면서 생긴 소소한 변화들이다.

 

 맥주 한잔을 시켜서 알베르게 야외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고, 하루를 되돌아보면 일기를 쓴다. 하루종일 걸었던 벌판길, 특히 시에스타 시간에 로스 아르코스에서 산솔까지 오는 길은 정말 인내를 시험하는 고행이었다. 일행들은 분명 로스 아르코스에서 멈췄겠지. 아니 멈추었기를 바란다. 너무나 힘든 길이었기에 일행들이 내일 아침에 편하게 그 길을 걸었으면 싶다. 내일 로그로뇨에서는 만나게 될까?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보게 되겠지. 어째든 오늘은 정말로 혼자구나. 주변에서 대화하는 소리로 조용하지는 않지만 어파치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들이라 맥주를 마시며 한가하게 생각에 젖어들어가려는데...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줄 알았다. 마을 입구에서 걸어올라오는 용만이, 보아, 현정누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맨날 난 더 이상 못가겠다고 부르짖는 현정누나가 따라왔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용만이가 날 알아보고는 스틱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오더니 한참 설을 푼다.


“현정누나가 그랬거든요. 저기만 돌아가면 형이 바에서 맥주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을것 같다고. 그랬는데 정말로 있는거에요. 얼마나 놀랬는지..”


이놈아 내가 더 놀랬다. 어떻게 헤어졌다 싶으면 악착같이 따라붙어오는지...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오고 있는 거야?”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오시고요. 소화선생님하고 민호하고 지영 누나는 로스 아르코스에서 묵고 내일 로그로뇨로 올거에요”


 소화누님이 못걸어서 멈춘건가 싶었는데, 문제는 민호였다. 발에 잡힌 물집 때문에 너무 아파해서 소화누님과 지영이가 같이 남았다고 한다. 생장피드포르부터 함께한 정이 있으니 민호만 남겨두기 그랬을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뺏긴 아쉬움과 일행을 다시 만난 반가움이 묘하게 교차한다.

알베르게에 주방 시설이 없기 때문에 저녁은 밖에서 사먹을 수 밖에 없다. 알베르게 앞에 식당이 있지만 괜찮은 식당이 있을까 싶어서 용만이와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더 나아 보이는 식당은 눈에 안띈다. 결국 알베르게 앞 식당에 예약을 하러 들어갔는데 바로 식사가 된다고 한다. 이제 겨우 7시 조금 넘었는데... 순례자들에게 의존하는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식사가 빨리 되는것 같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아도 돼서 좋다. 10유로짜리 오늘의 메뉴, menu del dia를 시킨다. 론세스바예스와는 다르게 제대로 여러 음식중에서 선택할 수가 있다. 일부러 선택한 것은 아닌데 다들 다른 음식을 고르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맛볼수 있었다. 음식들이 다 맛있고 잘 나온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고 다들 좋아한다. 디저트도 푸딩에, 아이스크림, 요거트, 케익 등등 여러 종류중에서 고를 수 있다. 론세스바예스의 그 엉터리 메뉴와는 천지차이랄까, 10유로가 안 아까운 저녁이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하루를 정리한다. 정말로 걷는게 고역스러웠던 하루. 걷는 내내 혼자였고, 홀로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일행들과 이제는 진짜로 헤어졌구나 싶어지며 느꼈던 고독감, 아쉬움, 그리고 다시 재회했을때의 반가움 등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한 하루였다. 가만히 내 자신을 바라다 본다. 진짜 내 속마음은 뭘까? 혼자 있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함께하고 싶은 것일까? 나도 내 속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