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0월 1일 (카미노 일정 첫날)

*고니* 2013. 3. 11. 10:57

10월 1일 (카미노 일정 첫날)


 한밤중에 쇼를 한번 해서인지 아니면 기차에서 꾸벅 꾸벅 졸아서인지 새벽 3시부터 잠이 깨버렸다. 소화누님이 새벽부터 일어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그냥 일어나 버렸다.

 

드디어 카미노 첫날.

 무사히 피레네를 넘어갈 수 있기를, 론세스바예스에서는 싼 알베르게를 찾게 되기를 빈다.

 하루에 12유로짜리 알베르게는 이번 한번으로 족하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내가 산정한 카미노 비용은 하루에 20유로 정도다. 숙박비로 10유로 이상을 써서는 답이 안 나온다.

 

 첫날 일정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27km 산길이다. 평지길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은 길인데 산길, 더구나 해발고도도 꽤 높고 경사도도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릴거라 예상하고 새벽부터 출발 준비를 한다.

 어제 먹고 남은 햇반과 참치캔 그리고 내가 가져온 즉석비빔밥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점심거리를 사기 위해 슈퍼가 열릴 시간까지 기다릴려고 했는데, 슈퍼가 9시는 넘어야 열린다는 소리에 그냥 출발하기로 한다.

 

 아직 6시도 안된 시각. 썸머 타임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로는 새벽 5시도 안됐을 무렵이니 동도 트지 않은 완벽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길을 찍어볼려고 사진기를 눌러보지만 프레쉬를 터트려도 찍히는 것은 한치 앞 세상이 전부다. 사진 찍는건 포기하고 그냥 걸어갈려고 하는데 처음부터 길이 이상하다. 카미노 표지 노란 화살표를 찾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하나 서성이고 있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묻지도 않았는데 다가와서는 길을 열심히 알려준다. 문제는 그게 불어라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다만 한가지 쭉 가다가 교차로에서 오른쪽 길로 가라는 손짓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근데 막상 교차점에 있는 표지를 보니 오리손 산장은 왼쪽길로 표시가 되어 있다. 이게 뭐냐? 우리는 분명 오리손 산장으로 간다고 했는데, 현지인은 경사도가 완만한 우회로를 알려준 것이다. 너무 과한 친절은 때로는 도움이 안될수도 있다.

 

 표지를 따라 산으로 산으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니 쫙 깔려 있던 구름 사이로 해가 떠오른다. 스페인, 아니 프랑스에서 처음이지 마지막일지 모르는 일출을 감상하며 계속 산을 오른다. 해가 떠오르면서 어둠속에 숨어있던 주변 풍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우리 나라 산과는 다르게 군데 군데만 나무가 있고 거의 목초지로 이국적인 풍경이다. 확실히 산은 우리나라가 더 아름답다. 산 경치보다 눈에 들어오는건 푸르디 푸른 하늘과 그 사이로 멋지게 펼쳐진 구름들이다. 무엇보다 하늘 풍경을 방해하는 건축물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첫째날은 거리상 론세스바예스까지 갈수밖에 없고, 두 번째 날도 중간에 알베르게가 없기 때문에 수리비(Zubiri)까지는 동행해야만 한다. 그 이후에야 걷는 거리에 따라 갈라지겠지만. 최소한 이틀은 같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일행들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 가고 싶지만 걷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조금씩 거리가 벌어졌다. 먼저 한참을 걸어가다보니 가장 먼저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오리손 산장 전에 물받는 곳이 있는데, 혼자 먼저 오다 보니 나만 보지 못하고 지나쳐 왔다. 물을 사야되나 고민하다 혹시나해서 산장지기에게 물을 채워줄수 있는지 물어보니 밖에 있는 수도꼭지를 손으로 가리킨다. 여기도 있구나. 역시 죽으란 법은 없는거다. 그리고 모를때는 현지인에게 물어보는게 최고다.

 

 물을 받는 사이 소화누님이 보카디요와 커피를 전부 사셔서 야외 테라스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는다. 뭘 골라야 하는지 몰라서 보카디요를 종류별로 하나씩 사셨다고 하는데, 바케트빵 반쪽에 햄(?)이 들어가 있는데, 햄 종류가 각각 다 다르다. 아무거나 골라서 먹는데 소화누님과 민호는 생고기 냄새가 역하다고 고기를 빼고 빵만 먹는다. 그렇게 맛이 이상한가? 호기심에 조금씩 잘라 먹어보는데 별로 이상한걸 모르겠다. 나름대로 맛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하몽이었다. 돼지 다리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생햄. 제대로 된 하몽은 치즈맛 비슷한 깊은 맛을 가지는데 오리손 산장에서 준 하몽은 싸구려인지 그냥 날고기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어차피 먹어야 힘내서 올라간다. 소화누님과 민호가 빼낸 하몽까지 바케트 빵속에 넣고 그냥 다 먹어치웠다. 비위 약한 내가 하몽은 아무렇지 않게 먹다니 스스로가 놀랍다. 스페인 음식이 내게 맞는 것일까.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오리손 산장으로 동양인이 한명 다가온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둥그스름한 얼굴 그리고 약간은 통통한 몸을 한 청년인데, 모두가 중국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느낌은 어째 한국인 같았다. 민호가 궁금한지 가서 말을 붙여보니 돌아오는 유창한 한국어. 역시 한국인이다. 잠시후 그 청년의 아버지하고 한 아주머니가 오리손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신가 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장피드포르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분이라 한다.

 

 청년의 이름은 O용만, 26세로 군 제대하는 날 바로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산티아고 길 끝난 이후 일정을 마음대로 하라는 아버지 말에 독일가서 맥주 관광을 하려고 따라왔다나... 알고보니 식신에 술에 있어서는 밑빠진 독이었다. 아들과 추억을 쌓으며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오신 아버님은 올해 연세가 64세이신 O시홍 어르신이다. 저 연세에 이 긴 길을 걷겠다고 오시다니 정말 대단해 보이신다. 용만이가 양어머니 삼았다고 하는 O은화 어머니는 44세로 요리강습을 하시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갖으려고 여길 오셨다고 한다. 작고 통통한 체구에 배낭을 매고 가시는 모습이 귀여우신 분이시다. 나이에 맞지 않게 해맑은 웃음하며 마치 나이를 잊은 소녀같다.

 

  새벽에 출발해 올때는 우리가 거의 일등이었는데, 오리손 산장에서 쉬는 동안 상당한 인원이 산장을 지나쳐 갔다. ipod touch에 스페인에서 만든 카미노 앱을 다운받아 왔는데, 그 정보로는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알베르게는 단 1개, 수용인원 110명이다. 그런데 벌써 한 50여명은 더 지나쳐 간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론세스바예스에서 비박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한다. 어차피 쉬기도 충분히 쉬었으니까.

 일행들이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민호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형, 저분은 어느나라 사람 같아 보여요?”


민호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성이 오리손 산장으로 오고 있다. 단발머리에 큰 키. 검은 머리에 검은 상하의 옷, 그리고 검은 운동화, 짙은 선글라스까지 블랙패션이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아가씨다. 왠지 한국인 같으면서도 일본인 같은 묘한 느낌.


“글세, 일본인 같은데...”


옷 입은 스타일이 일반적인 한국 여성들과는 좀 달라서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민호와 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쳐다보는걸 의식해서일까 오리손 산장 입구에 있는 탁자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헉. 또 한국인이다. 지영이 말고 또 젊은 아가씨가 혼자서 이 산티아고 길을... 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아가씨가 뒤로 돌아보며 누군가를 부른다. 보니까 키가 좀 더 큰 또 다른 아가씨가 헉헉거리며 오고 있다.

 오리손 산장에 있는 30여분 동안만 용만이 일행 3명, 여성팀 2명, 도합 5명의 한국인을 만났다. 우리 일행까지 한국인만 10명. 어떻게 보는 동양인마다 다 한국인인지. 이런식으로 가면 오늘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알베르게는 한국인들이 다 점령하고도 남겠다는 공포감마저 든다.

 

 오리손 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계속해서 오르막 길이다. 경사도 조금더 가팔라진다. 자기 페이스에 맞춰 걷지 않으면 못 넘어갈 것 같아서, 각자 알아서 가고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나기로 한다.

 

 1시간 정도 걷고 5분에서 10분 정도를 쉰다. 쉴때는 배낭을 내려놓고 완전히 주저 앉아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어서 땀도 식히고 발에 열기도 빼고 물집이 잡힐 징조가 있나 살핀다. 단 걸을 때는 남들보다 빠르게 걷는 편이다. 지영이도 누가 지리산 산골 소녀 아니랄까봐 걷는 속도가 꽤 빠른 편인데, 쉴때도 배낭을 매고 서 있는다. 민호와 소화누님은 평소에 잘 안걷던 사람들이라 점점 거리가 벌어지며 쳐진다. 해인이는 여행을 오래 한 사람이라 체력에 문제는 없지만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다보니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뒤로 쳐져 소화누님과 같이 올라온다.

 내 뒤를 따라오던 용만이는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알베르게가 110명 수용이라 빨리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수도 있다는 말에 쉬지도 않고 그냥 쭉 내달려 버린다. 군 제대하고 바로 왔다더니 체력 하나는 끝내준다.

 

 산을 오르면서 점점 일행들과 떨어져 홀로 걷게 된다. 바람 소리만 들릴뿐 일체의 소음이 없다보니 차분하게 주변을 응시하게 된다. 해발고도가 높아지다보니 간간히 있던 나무도 이제는 없고 보이는 것은 풀과 돌뿐이다. 길게 뻗은 길 위를 저 멀리 앞서 가는 순례자를 따라 걸어간다. 일체의 잡념이 사라지고 그냥 조용히 걷기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머릿속을 채운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이 길 위에 섰는데 걷다보니 생각 자체가 사라진다. 그냥 하얗게 백지가 되버리는 느낌이랄까.

 

 이국적인 산을 감상하며 아무생각없이 걷다보니 정상을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 길이 펼쳐진다. 갑자기 좌우로 나타나는 나무 군락. 그리고 스페인과의 국경선임을 보여주는 철조망. 철조망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바닥에 고랑이 파져 있고 철로 된 바가 몇 개 박혀 있다. 이게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곳이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국경을 걸어서 건너간다는 것에 묘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부터 다리뼈와 골반이 만나는 곳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진다. 과거에 몇 번 다친 경험이 있는 무릎만 신경 썼지 다른 곳이 문제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허리도 무릎도 아닌 골반쪽이라... 상상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10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장시간 걷다보니 무리가 오는 것이다. 통증 때문에 걷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나마 오르막 길은 어떻게 걸어갔는데 산등성이를 하나 넘자 갑자기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멀리 론세스바예스가 보인다. 옆으로 도로가 있는데 카미노 길을 표시하는 노란 화살표는 도로가 아닌 숲쪽을 가리키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쉴 마을이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숲으로 들어갔는데, 숲에 들어가자마자 급경사로 내리막 길이다. 보통은 지그재그로 돌아내려가기 마련인데, 이건 직선으로 그냥 급경사다. 무슨 직활강 코스라도 만든건가 의심될 정도로 그냥 쭉 내리막이다. 무릎이 안좋아 원래 내리막길은 천천히 걷는 편인데 골반에 통증까지 오니, 이건 완전히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간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올 때는 앞서가는 사람들을 추월해 왔는데 내려올 때는 다들 나를 지나쳐 손살같이 사라져 간다. 이미 내 앞에 몇 명이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가 다 차건 말건 지금은 무사히 도착할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내리막길이라 통증이 더 심해지면서 걷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숲에 들어와 있으니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다.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 안된다.

 

 정말 그로기 상태에서 더 이상 못걷겠다고 느낄때 갑자기 다른 숲길에서 가벼운 복장의  남녀가 나타났다. 배낭도 매지 않았으니 분명 마을 사람들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마을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거. 조그만 희망에 다시 힘을 내서 걷다보니 갑자기 숲이 끝나면서 건물이 나타난다. 드디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것이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으니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데 9시간 이상이 걸린 것이다.

 

 론세스바예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물에서 또다른 한국인 3명을 만났다. 아버지와 딸 그리고 따로 온 아가씨 한명. 이들은 어제 오리손 산장에서 쉬고 아침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고 한다. 아들과 함께 온 용만이 아버님도 대단하시지만 딸과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신 이 어르신도 만만치 않다.

 어떻게 지나치는 지역마다 새로운 한국인들을 만나는지 내가 진짜 산티아고 길 위에 있는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알베르게는 달랑 1개. 수용인원은 110명. 이미 내 앞을 지나쳐간 인원이 얼마인지 알수없는데, 이분들처럼 오리손에서 출발한 인원까지 합친다면... 정말 비박해야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며 산티아고 협회가 있는 건물을 향해 갔다.

 협회 건물 앞에 용만이와 아버님, 어머니, 지영이 그리고 해인이가 쉬고 있다. 해인이가 지나가는 걸 못봤는데 알고보니 자전거로 도로를 따라 내려와서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알베르게로 안가고 왜 여기 있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협회가 4시에 문을 연다. 협회도 시에스타(siesta)에 맞춰서 쉬는건가. 론세스바예스는 협회에서 스탬프를 찍고 숙박료를 지불하고 알베르게 숙박증을 받아가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알베르게도 협회 오픈시간 4시에 같이 개방된다. 오픈시간은 신경도 안 썼는데...

 

 기다리는 동안 등산화를 벗고 발을 살펴봤다. 다행히 물집은 잡히지 않았다. 골반쪽 통증만 어떻게 완화되면 걷는데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지니 안도가 된다. 쉬고 있으니 소화누님과 민호가 도착한다. 둘 다 평소에 잘 안걷던 사람들이라 발에 물집이 잡혀 있다. 해인씨야 여행을 오래했으니 이미 단련되어 있고, 지영씨도 지리산 소녀니 산행은 이력이 났는지 문제가 없다. 역시 몸은 정직하다. 단련된 만큼 버텨주고 안하던 것을 하면 탈이 난다.

 

 얼른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에 4시에 협회 문이 열리자마자 스탬프를 찍고 6유로를 내고 알베르게 숙박증을 받았다. 협회 앞에 있는 알베르게 건물로 들어가보니 자원봉사자들이 앉아서 들어오는 순례자들에게 안내를 해준다. 침대는 아무거나 자리 잡으면 되고, 알베르게는 10시에 문을 잠그고 아침 6시 반에 불을 켠다고 한다. 침대는 2층 침대인데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다. 거의 집단 수용소 분위기지만 그래도 허리펴고 누워서 쉴수 있다는 것에 만족이다.

 

 

 

 네이버 까페에서 배드벅을 피할려면 가급적 벽에서 떨어진 햇볕이 잘드는 곳에 있는 2층 침대를 쓰라고 했던 조언을 따라 중앙에 비치된 침대 2층에 짐을 풀었다.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옛날 교회 건물인지 사방이 다 벽이라 창문이 없다. 수용인원이 110명인데 지하에 있는 샤워부스는 남녀 각각 2개 밖에 없다보니 샤워할려고 줄을 길게 늘어선다. 내려가보니 샤워줄에 정호씨가 서 있다. 카미노 길 위에서는 결국 다 만나게 된다더니 하루만에 조우했다.

 

 샤워를 끝내고 세탁을 하려고 하는데 세탁기가 우리나라와 다르다보니 이용방법을 잘 모르겠다. 사용설명서도 스페인어니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 용만이가 캐나다에서 7년간 살았다기에 잘 알거라 생각했는데, 건조기에 세제를 넣고 돌리는 실수를 한다. 기계가 2대 있는데, 둘 다 세탁기인줄 알았는데, 한 대는 세탁기 한 대는 건조기였다.

 사고를 수습하고 세탁기가 다 돌기를 기다리는데 여성 자원봉사자가 와서 뭐라고 설명하는데 스페인어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말하는 느낌으로는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 같은데,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다. 다행히 다른 자원봉사자중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 있어 용만이가 설명을 듣고 왔다. 캐나다에서 6년 넘게 살았다고 하더니 영어를 정말 잘한다. 여기 알베르게는 세탁비를 받고 그 여성 자원봉사자가 세탁을 해 주는 거였다. 비용이 1.5유로라고 해서 돈을 모아 데스크에 세탁물을 가져 갔는데, 여기서는 비용이 1.2유로라고 한다. 어떻게 된게 자원봉사자들마다 말이 다 다른지... 가득이나 이해도 못하는 스페인어, 뭐가 이리도 뒤죽박죽인지 머리만 아프다.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주방시설이 없다. 식사는 사먹을 수밖에 없고 식당도 알베르게주변에 달랑 2개밖에 없다. bar와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식사는 7시 반과 8시 반 중에 골라야 하고 메뉴도 순례자 메뉴뿐이다. 다들 일찍 쉬고 싶은 마음에 7시 반을 예약하고 시간에 맞춰 갔다. 용만이 일행 3명과 우리 일행 5명, 그리고 민호가 길을 걷다가 만나 친구가 된 일본인 청년 유스케까지 9명이 둥근 식탁에 둘러 앉았다.

 

 산티아고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나오는 menu del peregrino, 순례자 메뉴에 대해 솔직히 많이 궁금했었다. 순례자 메뉴는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요리, 프리메르 플라토(primer plato 첫 번째 요리)와 세군도 플라토(segundo plato 두 번째 요리) 그리고 디저트와 빵, 와인 또는 물로 구성된다. 여기는 어떤 요리들이 있을까 조금은 기대를 갖고 자리에 앉았는데, 메뉴판은 주지도 않고 그냥 식사가 나온다. 보통 세네가지 요리중에서 선택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이게 뭐지? 알고보니 식당은 2군데 밖에 없는데 식사를 할 사람이 많다 보니 식사 시간에 따라 요리를 정해 버렸다고 한다. 7시 반은 생선요리, 8시 반은 고기요리. 메뉴건 공지사항이건 모든게 스페인어로만 써져 있으니 알수가 없다. 그냥 주는데로 먹을뿐.

 

 빵과 스파게티가 나오고 다음에 감자튀김과 생선을 통째로 튀긴것이 나온다. 이런 요리를 10유로, 만 5천원 이상을 주고 먹고 있다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만 든다. 선택 권한이 없으니 울며겨자먹기로 배를 채운다. 식사를 다하고나니 디저트를 가져다 주는데, 디저트도 선택권한이 없다. 그냥 요플레를 용기에 담지도 않고 상점에서 파는 그대로 가져온다. 황당함에 다들 헛웃음만 짓는다.

 

 여태까지 알아온 카미노 지식과 내가 오늘 하루 겪는 것이 왜이리 차이가 심한건지 적응이 쉽지가 않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는 고사하고 간단한 영단어조차 여기서는 통하지가 않는다. 오로지 스페인어뿐이다. 슈퍼마켓(supermarket)이란 단어조차 안통하고 슈페르메르카도(supermercado)라고 해야만 알아듣는다. washing machine, dryer 그 따위거 하나도 안통한다. Lavadora, Secadora다. 참 대단한 스페인이다.

 

 내일은 수리비(zubiri)나 나라쏘냐(Larrasoaňa)까지 가야 한다. 수비리 전에는 알베르게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수비리까지 21km는 걸어야 한다. 어디까지 갈지 결정을 해야 하는데 침낭속에 들어가 있으니 그냥 쉬고만 싶어진다. 오늘 밤은 쥐가 나서 비명을 지르지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