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목요일
사리아(Sarria) -> 포르토마린 (Portomarin) 22km
어제 10시 가까이 되서 잠들어서일까 아니면 피곤해서일까, 잠을 깨보니 4시 44분이다. 444라. 이거 좋은거야 나쁜거야. 배드벅이 없는지 가려움도 없고, 인간 난로의 위력일까 스팀의 위력일까 실내 온도가 약간 덥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침낭을 열어젖히고 잠들어 있었다. 조금 더 자야지 하는데 옆 침대의 외국인이 코를 골아대기 시작한다. 음악을 들으며 다시 수면모드에 돌입. 다시 잠을 깨보니 6시다.
어제는 너무 굶주렸었기에 장을 볼 때 넉넉하게 준비했었다. 바케트 빵에 하몽, 햄을 곁들여 먹는다. 쥬스에 요플렛까지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언제나처럼 첫 번째 마을 bar에서 멈춰 커피 한잔을 하기로 하고 출발한다. 철길 옆으로 난 길을 지나 조그만 산을 넘어가니 건물들이 나오는데 한 건물에 스탬프 표지가 있다. 들어가보니 산티아고까지 108km 남았다는 스탬프다. 108이라, 108번뇌라는거야 뭐야. 오늘 숫자들이 다 왜 이러지.
이왕 멈춘 김에 아침부터 안좋다고 하던 민호 발을 살펴본다. 평발인 녀석이 발바닥 한 복판에 굳은살이 잔뜩 틔어나와 있다. 스위스 칼로 굳은살을 제거하는데 고름이 나온다. 이그 곰탱이 같으니라고, 곪도록 말도 안하고 참았다니 기가 막힌다. 일행중에 간호사가 2명이나 있는데 말만 하면 될 것을.
이때부터 직업 정신 나오신다. 보아가 바늘로 곪은 부분 제거하고 고름을 짜낸다. 민호 표정이 완전 산모가 애 낳는것 같다. 얼굴을 일그러질대로 찡그리면서도
“보아 누나는 천사에요”
입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나가던 외국인이 보더니 콤피드 하나를 주고 간다. 고름을 다 짜내서 급한 치료는 대충 완료하고 알베르게 도착하면 다시 보기로 한다. 민호 치료에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더니 다음 마을 bar에 도착했을 때는 소화누님과 어머니, 아버님은 다 쉬고 출발 준비 중이셨다. 민호 상태 때문에 바로 따라갈 수 없어 쉬기로 한다.
민호 발 상태로 그 무거운 배낭은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다음 마을까지만 용만이가 배낭을 매고 가기로 한다. 전에도 한번 해봤으니 문제 없다며 민호 배낭과 자기 배낭을 앞뒤로 매고 걸어가는데 그 무게를 짊어지고 잘도 걷는다. 진짜 괴물은 괴물인데 여러 사람 도와주는 착한 괴물이네. 용만이도 인간인지라 배낭 2개를 매고 산길을 걸었더니, 아버님 일행이 쉬고 있는 다음 bar에 도착했을 때는 땀이 흥건하다. 구라 세자매는 쉰지 얼마 안됐다고 먼저 가버린다. 용만이가 숨 좀 돌릴수 있게 잠시 쉬고 떠나려는데 어르신들은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겠다며 남으신다.
아직 점심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어 다음 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걸어가는데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배는 점점 고파오는데 중간에 식사가 가능한 bar 겸 레스토랑이 있지만 세자매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에서 쉬어갈텐데 어디로 갔을까? 좀 더 가보기로 하는데 포르트마린까지 4.5km라는 표지가 나온다. 점심 시간은 이미 지났고, 세자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무조건 처음 나오는 bar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걸어가는데 내리막 길이 장난이 아니다. 절뚝거리는 무릎으로는 빨리 걷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너무나 심하게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엉금 엉금 기어가는 사이에 아버님이 추월해서 지나가신다. 예순이 넘은 아버님보다 무릎이 안 좋으니 이거야 원...
내리막 길을 다 내려가 도로를 따라 돌아가니 포르트마린으로 들어가는 기다란 다리가 나오고 그 끝에 돌계단이 보인다. 저기까지만 올라가면 끝이구나 싶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 걸은 거리는 23km로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닌데 오르막과 내리막 길을 계속 걷다보니, 특히 내리막에서 무릎 때문에 조심해서 걸었더니 시간은 많이 걸렸다.
어느 알베르게에 들어갈지 결정하지 않았기에 길가에 있는 bar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용만이가 알베르게 탐방하며 세자매를 찾겠다고 하는 순간 뒤에서 민호와 세자매가 올라온다. 우리가 못보고 지나친 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왔다고 한다. 용만이와 내가 지나가는걸 봤다는데, 그럼 좀 불러줘야지. 남은 점심도 못먹고 찾아다녔는데...
협회 알베르게 시설이 너무 안좋아서 사설로 가기로 한다. 지영이는 너무 피곤하다며 혼자 협회 알베르게로 가버린다. 조용히 혼자만 있고 싶은 걸까?
10유로나 주고 들어간 사설 알베르게는 비싼만큼 시설은 참 좋다. 용만이는 배낭 2개를 짊어지고 힘들었는지 샤워를 마치자 바로 쓰러져 잔다. 어제 빈대 때문에 잠을 설쳤다더니 많이 피곤했나보다.
저녁 시간이 다되서 자고 있는 용만이를 깨워 장을 보러 마트로 간다. 현정누나와 보아는 지영이 데리고 저녁 먹는다며 협회 알베르게로 간다. 둘이서 장을 보고 다른 일행들이 식사하는 레스토랑으로 간다. 석양을 볼수 있는 전망좋은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하늘 구경을 하며 식사를 한다.
집 떠나온지 벌써 한 달. 50일 여정으로 시작한 길게만 느껴지던 스페인 여행이 반을 넘었고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도 이제 90km가 안된다. 혼자 고독을 씹겠다며 온 길인데, 너무나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지금까지 왔다. 한달도 체 안된 기간인데 매일같이 밥먹고 자고 일상을 함께하다보니 그동안 든 정이 너무나 크다. 이제는 이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 산티아고 길을 다 걷고 혼자서 됐을 때 어떻게 남은 여행을 계속할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모든 것에 끝은 있는거니까, 그냥 남은 시간을 즐길수밖에. 석양을 보며 마음을 정리한다.
저녁을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배 채우기 용으로 산 피자와 과자를 꺼내놓고 대화를 이어간다. 슈퍼마켓 갈 때마다 있어서 무슨 맛인가 하고 산 참치 피자는 첫조각 먹을때는 그래 이정도까지는 먹어줄만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어떻게 먹었는데, 두 번째 조각 먹을때는 우웩, 도저히 안들어간다. 피자의 본고장 이탈리아가 바다만 건너면 바로인데, 이 무슨 만행같은 맛인지, 완전 실패한 선택이다. 과자 타임이 끝나도록 민호와 보아, 현정누나가 돌아오지 않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현정누나와 보아가 지영이와 함께 돌아왔다.
“용만아, 누나가 선물 사왔어”
“혹시, Hendrick's Gin"
현정누나가 뭔가를 사왔다고 하는데, 용만이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맞혀버린다. 용만이는 촉이 너무 좋다. 그래도 그렇지, 모르는척 해줄것이지 그렇게 바로 맞추냐. 슈퍼에서 보이길래 용만이 생각이 나서 사왔다고 한다. 결국 현정누나와 보아가 사온 포도주로 다시 2차 후식시간을 갖는다. 배가 너무 불러서일까 아니면 몸 상태가 나빠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포도주가 이상한 걸까, 포도주 맛이 정말 별로다.
“여기 올 때 나름대로 계획한 것이 있을테니, 내일부터 3일간 각자 여행을 하고 산티아고에서 11월 1일에 만나도록 해요”
오늘 오는동안 아버님과 어머니와 얘기를 했다며 소화누님이 제한을 하신다. 걷는 길에 계속 마주칠텐데 갑자기 모른척하고 걷는다는게 가능할까? 예전에 헤어졌으면 모르지만 다 끝나가는 시점에... 소화누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성은 없어 보인다. 각자 목적했던 여행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갖자는 취지는 좋지만, 굳이 일부러 헤어져야 할까? 용만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모 아니면 도라고 헤어져야 한다면 완전히 질러가서 마주치지 않거나 아니면 같이 가자는 거다. 산티아고 도착하면 헤어지게 될거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남은 시간이나마 좀 더 같이 있고 싶은게 지금의 솔직한 내 심정이다. 아침에 불길했던 숫자들이 이걸 예언했던 걸까? 어차피 내일 길을 갈 때 되면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
지영이를 데려다 주는 길에 bar에 앉아 있는 카를로스와 루이스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현정누나가 너무나 좋아한다. 누나와 저분들도 참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서로 통하는 언어가 없으면서도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화에서 중요한건 언어가 아니라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걸 느끼게 해준다. 카를로스와 루이스 아저씨는 30-30-30-5km로 남은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시다. 산티아고에서 스탬프 받는 시간이 길어 일찍 도착하려 한다는 루이스 아저씨 말에 수긍이 간다.
알베르게에 돌아와 남은 일정과 알베르게 위치를 확인해 보니 일정이 뻔하다. 내일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25km, 모레 아르수아(Arzua) 28km, 문제는 3일째에 페드로우소(Pedrouzo)까지 19km만 가서 마지막 알베르게에 묵고 20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더 걸어서 Hostel에서 묵고 일찍 산티아고에 들어가느냐다. 결국, 소화누님의 뜻은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언제나 현실과 이상은 괴리가 있다... 음, 이건 좀 안어울리나. 뭐가 됐던 결국 흘러가는데로 가면 될 것 같다.
“승호씨는 자신의 매력을 본인만 모르고 있어. 좀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해 봐요”
어머니가 길을 걷는 동안 계속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현정누나도 그렇고 모두들 내가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너무나 꼬여버린 인생이기에 서서히 자신감을 상실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이랬었나 생각해보지만 과거는 희미하기만 하다. 예전에 내가 어땠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어머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산티아고 일정이 끝났을 때 내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남은 인생 힘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사랑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원하는 일이 있을 때, 과감히 한 발을 내딛어 봐요. 승호씨는 너무 머리가 앞서. 가끔은 본능에 충실해 봐요”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을 버리고 본능에 따라 움직여본 적은 내 기억에 없었던 것 같다. 이 길 끝에서 나는 조금은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까? 이 길을 걷다 보면 악마를 보게 된다고 한다. 내게는 여자가 악마인가 보다. 자꾸 번민만 커지고 있으니. 뭐가 옳은 길인지,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