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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고니* 2013. 3. 11. 12:51

 10월 18일

엘 부르고 라네로 (El Burgo Ranero) ->푸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 25km

 배드벅 때문일까 내 과민반응일까 간지러움 때문에 잠을 이루기 어렵다. 매일같이 보아와 현정누나가 배드벅 퇴치 약을 뿌려가며 방역을 해줬는데, 어제는 다른 마을로 둘다 가버렸으니 방역이고 뭐고가 없다. 헤어질때 약이나 빌려올걸. 간신히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1시도 안됐다. 무지 긴 밤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같은 방에 들어온 외국인이 코골이를 한다. 엎치락 뒤치락하며 비몽사몽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결국 5시 반에 일어나보니 벌써 2명이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길을 떠난것보다 내가 알아채지도 못하게 조용히 사라졌다는게 더 놀랍다.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보니 일어난 사람이 없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지영이도 없으니 넓은 식당이 전부 내 차지다. 짐을 다 꺼내 놓고 배낭의 터진 부분을 꼬맨다. 오래된 배낭이기도 하지만 매일같이 짐을 꾸렸다 풀렸다 하다보니 양쪽 옆부분이 조금씩 터져있다. 양말 구멍나면 기울려고 가져왔는데 정작 양말은 멀쩡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배낭 수선하는데 실과 바늘을 사용하고 있다.

 

  배낭 수선을 끝내고, 점심으로 먹을 보카디요를 만들고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서 식당도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소화누님이 어제 저녁 먹고 남은 밥을 죽처럼 끓여 오신다. 따뜻해서 좋기는 한데 맹숭맹숭해서 김치가 그리워진다.

 

 지평선에서 뜨는 일출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동트기 직전에 출발하기로 한다. 스페인 올 때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거였다. 이 구간이 거의 평지다보니 운만 좋다면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된다. 구름도 없이 맑은 날이니, 언덕이나 나무들만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면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 마을을 벗어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해 어스름이 걷히는 것을 보다 8시가 되기 전에 길을 떠난다. 길은 어제처럼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쭉 이어진다. 길 왼쪽으로 가로수가 심어져 있지만 오른쪽으로는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없다. 오른쪽에서 해가 떠야 할텐데, 방향이 맞나 모르겠다.

 

 

 생각보다 일출이 늦다. 지평선 끝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어 마을을 벗어나기만 하면 떠오를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가도록 해가 솟아오르지 않는다. 일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어서인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것 같다. 조그만 언덕이 앞에 보인다. 설마 저기를 지나갈 때 해가 떠오르면 완전 뭐되는건데... 기다렸다 가야하나 아니면 빨리 지나쳐야 하나 갈등이 된다. 그래도 아직 해가 뜰 기미는 없고, 좋지 않는 발로 최대한 빠르게 걷는다. 언덕을 지나 넘어갈 때 뒤를 돌아보니 해가 솟아오르려 한다. 다행히도 제때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다. 스페인 와서 제대로 된 일출을 처음으로 감상한다. 바다에서 뜨는 해는 수면에 반사되서인지 일렁이는 느낌이 있는데,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그런 느낌이 없이 그냥 깨끗하게 올라온다. 보고 싶었던 장면을 직접 보게 되니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이 순간 만큼은 모든걸 잊고 행복에 잠긴다.

 

 

 행복한 순간이 잠시였다면 그 이후로는 장시간의 고행이다. 비야마르코(Villamarco)마을은 산티아고 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어 들리지 않기 때문에 렐리에고스(Reliegos)마을까지 쉴 수 있는데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13km나 떨어져 있다. 2~3시간은 쉬지않고 걸어야 하는 길. 도로를 따라 가지만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고, 볼거리도 없는 길이다. 민호는 어제처럼 육체적으로도 지치지만 계속 같은 장면에 미칠것 같다며 땅만 보고 간다.

 

 

 앞 뒤로 그냥 쭉 뻗은 길을 보며 생각한다. 끝이 없어 보이는 길도 결국 끝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멈춰서 있으면 끝이 없는 벌판 한가운데지만, 계속해서 걸어가면 결국 어딘가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묵묵히 길을 걷는다. 어차피 쉴 벤치도 없는 길이니 걷는 것 말고는 수가 없다. 멀리 조금만 둔덕이 보인다. 저기를 넘으면 마을이 있을까 싶었는데 올라가보니 다시 쭉 이어지는 길.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해준다. 거의 2~3시간은 걸은것 같은데. 다시 얕은 둔덕이 보인다. 저기를 올라가서도 마을이 안보이면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어야 할 판이다. 언덕에 올라가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한 3~4km 떨어진것 같은데 쉬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게 만들어 주는 거리다. 이미 버린 몸. 물집이 더 커지기밖에 더하겠나. 그냥 가보지하는 심정으로 언덕을 돌아 내려가자마자 나타나는 다른 마을. 언덕에 가려서 안보였는데 언덕 바로 밑에 렐리에고스 마을이 있었다. 한참을 더 가야할줄 알았는데 바로 밑에 마을이 나오니 괜히 횡재한 느낌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bar가 보인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에 몸을 녹인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13km를 걸어와서인지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다들 들려서 쉬어간다.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침에 만든 보카디요에 사과에 가지고 있는 음식들을 다 거덜낸다. 배를 채우며 20여분을 기다리니 아버님이 오신다. 시간 차이가 많이 났다 싶었더니, 중간에서 다들 음식을 먹으며 쉬었다고 한다. 이미 쉴만큼 쉬었기에 일행들이 도착하는것을 보고는 바로 출발한다. 다음 마을 만시야(Mansilla)까지 10km 가는 길도 여전히 벌판길이다. 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되니 생각이 사라지고 머리가 단순해진다. 그냥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만시야에 들어가 처음 발견한 bar로 들어간다. 알베르게를 겸하고 있는 곳인데, 카냐를 시키니 바케트에 하몽을 얹은 공짜 타파스를 준다. 용만이와 헤어진 이후로 맥주를 먹을때마다 공짜 타파스가 나온다. 용만이가 없으니 먹을복이 터지는데 이참에 아예 버려버려?


“아버님, 용만이 똥줄 좀 타게 아예 레온까지 가버릴까요?”

“그럴까요?”


 내 농담에 아버님도 웃음으로 받아치신다. 오늘 레온까지 간다면 총 37km를 걸어야한다. 거리도 거리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레온에 떨어지기 때문에 오늘은 25km만 걸어서 푸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까지만 가기로 했다. 그러면 내일 12km만 걸어서 레온 들어가니까 제대로 쉬면서 도시 구경을 할 수가 있다. 만시야에서 어제 갈라졌던 길이 합쳐진다. 용만이와 세자매가 여길 지나갔을까 아니면 아직 오고 있을까? 우리보다 좀더 걸어야 하니까 아직 도착 안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도착했다면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빨리 민호와 소화누님, 어머니가 도착했다. 저쪽 팀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니 그냥 가자는데 모두 동의한다. 만시야를 벗어나자 길은 다시 도로를 따라간다. 주변은 벌판, 아까와 같은 풍경인데 다른점이 있다면 레온이 가까워져서인지 도로에 차량이 많이 다닌다. 이제 조용한 시골과 잠시 이별하고 소란스러운 문명속으로 들어가는것 같다.

 

 도로를 따라가니 마을이 나타난다. 렐리에고스 마을을 지날때 받은 전단지의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약도하고 이곳 지리가 틀리다. 어떻게 된거지? 들어올때 마을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더니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지영이가 있으면 바로 답을 줄텐데...


“민호야, 책 좀 내놔봐”


뒤따라오는 민호에게서 책을 받아 지도를 찾는다. 민호가 가진 책은 지영이꺼와 똑같다. 지영이가 매일 알아서 길을 찾아주다보니 지금까지 민호가 책보는 것을 한번도 못봤다. 생장피드포르에서 그렇게 버리라고 했건만 지금까지 보지도 않으면서 잘도 가져왔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오늘 목적지 푸엔테 비야렌테(Puente Villarente)가기 직전에 있는 마을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Villamoros de Mansilla)에서 헤메고 있었다. 이름 앞부분이 비슷하다보니 그냥 이 마을이겠구나하고 착각한 거였다. 2km를 더 가야지 목적지다. 좀더 가자 옛날에 만든 다리가 나온다. 차 2대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폭이라 사람이 다니는 인도도 너무나 비좁아 한명이 겨우 다닐 정도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푸엔테 비야렌테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알베르게가 있는데, 우리가 목표로 한 곳은 안쪽에 있는 Albergue San Pelayo 알베르게다. 알베르게를 찾아 올라가는데 이럴수가 싼 펠라요 알베르게 옆이 소축사다. 냄새 죽여주시고, 길가에 파리가 수도없이 날라다닌다. 다들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로 가는데 동의해서 돌아갔는데, 이런 문이 닫혀있다. 아예 영업을 안하는 곳 같다. 이제는 냄새를 맡으며 여기 남던가 레온까지 가야한다. 나야 상관없지만 어르신들에게 12km를 더 간다는 것은 아무리봐도 무리다.


“혹시 알아. 안에 들어가보면 냄새 안나고 괜찮을지..”


어머니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말씀하신다.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으니 희망이라도 가져봐야지. 다시 싼 펠라요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알베르게 안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괜찮다. 나름의 운치도 있고, 우선 소축사의 똥 냄새는 안난다. 모든게 좋은 알베르게도 없지만 모든게 나쁘기만한 알베르게도 없다. 숙박료 계산을 하는데 앱 정보로는 7유로라고 나왔었는데 8유로를 받는다. 역시 오래된 정보는 믿을게 못된다.

 

 

 

 이곳 알베르게의 샤워시설은 자동센서로 불이 들어오는데, 샤워기 근처만 가면 센서가 거리가 멀기때문인지 인지를 못해서 불이 꺼진다. 어둠속에서 샤워를 하라는 건가, 아니면 샤워하면서 쇼를 하라는 건지. 센서에 손한번 휘저어서 불켜고 샤워기 한번 작동시키고 다시 불켜고, 완전 쇼를 하면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용만이와 보아가 들어온다.


“형....”

“누구세요?”

“에이, 형....”


징그럽다 이놈아.


“말 안해도 알아서 잘도 찾아오는구나. 현정누나와 지영씨는?”


 현정누나와 지영이는 발도 아프고, 레온에서 좀 쉬면서 쇼핑도 하겠다고 만시야에서 버스타고 레온까지 가버렸다고 한다. 발 아프다는건 어째 핑계 같고, 쇼핑을 위해서 갔다고 봐야겠지. 여자들에게 쇼핑의 힘이란...


“우리가 형이 어디까지 갈까 얘기 했었거든요. 형이라면 나 당해보라고 레온까지 충분히 질러갈 사람인데, 같이 있는 사람이 아버지, 어머니, 소화 선생님에 민호씨란 말이에요. 그분들이 과연 갈수 있을까 했을때 아니거든요. 그래서 여기 남았을 가능성 90%, 레온까지 갔을 가능서 10%라고 봤는데, 딱 맞았죠”


오래 붙어다녔더니 서로를 너무 잘안다. 어느정도 걷고 어디서 멈출지, 그리고 어떤 계획을 세울지까지 대충 윤곽을 그리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래, 넌 그렇게 여자가 좋았더냐? 너 이어폰 꽂고 빨리 간거 일부러 그랬지?”


내 놀림에 용만이 침을 틔기며 항변한다.


“형, 오해야. 내가 어제 빨리 갈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4시 이후에는 걷기 싫어서 그전에 도착할려고 앞으로 남은 거리 얼마, 시간 얼마해서 계산까지하고, 걸어서는 도저히 4시 전에 도착하지 못할것 같아서 5분마다 100m씩 달렸어요.”


 배낭을 메고 달렸다고. 뭐냐 이놈은? 이게 사람이야.


“마을에 4시 훨씬 전에 도착해서 맥주 마시며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안오는 거에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1시간쯤 기다리니까 불안해 지더라고요. 잘못 왔나 싶어지면서”

“모든 순례자가 왼쪽길로 가는데 혼자 오른쪽 길로 가놓고서는...”

“제가 워낙 달렸더니 앞뒤로 사람들이 없는 거에요. 그냥 화살표만 보고 따라갔죠”


 용만이가 변명을 해도 왜 자꾸 계획된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까. 그래도 멀쩡한 얼굴로 다시 보니까 반갑네.


“근데, 진짜 형이 그 길을 걸었어야 했는데, 형이 원하던 장면이 거기 있었어”

“맞아. 오빠가 거기 갔어야 하는데.”


 용만이와 보아가 이구동성으로 그 길을 내가 갔어야 한다고 한다. 걸으면서 다들 내 생각을 했다나. 용만이가 사진을 보여주는데, 정말 장관이다. 파란 하늘과 길 그리고 지평선. 다음에 다시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된다면 가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내가 걸었던 길에서도 많이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충분한 고행도 덤으로 했고...

 

 여기 알베르게도 주방시설이 있어 저녁을 해먹기로 의견을 모은다. 저녁거리를 사러 용만이와 보아와 함께 마을 대로로 나간다. 스페인의 간판은 왜이리도 눈에 안들어오는지 역시나 슈퍼마켓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 슈퍼가 어디있는지 묻는다. 참 낯짝 두꺼워진것 같다. 하도 묻고 다녔더니 이제는 주저하는 것도 없고 아무나 붙잡고 묻는다. 물어보니 맞은편에 한 곳, 좀 더 떨어진 곳에 또 한곳이 있다고 알려준다. 씨에스타 시간이다보니 문이 닫혀있다. 슈퍼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근처 bar에서 한 잔 하려고 들어갔더니 앨빈이 있다. 우리 알베르게 근처 풀밭에 텐트치고 자려고 했는데 허락을 안해줘서 레온으로 가는 중간에 아무데서나 텐트치고 잘 거라고 한다. 참 대단하고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 날을 마지막으로 앨빈을 보지 못했다. 산티아고까지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알베르게 아저씨 때문에 교차했던 인연이 갈라졌다. 사소한 것 하나로 맺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것, 그래서 인연이란 어디로 움직일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한잔하고 5시가 넘어 찾아갔는데도 슈퍼가 문을 안 열어 떨어져 있다는 다른 곳을 찾아나선다. 가보니 고기 종류가 대단히 많다. 당연히 용만이는 하몽을 보고 광분하며 어느 것을 맛볼까 고민한다. 이 슈퍼는 칸막이로 막혀 있어 안에 들어가 물건을 직접 고를수가 없어 뭘 달라고 말을 해야만 한다. 문제는 밀가루가 뭔지 아무도 모른다는거. 아무리 설명해도 주인 아저씨는 알아듣지 못한다. 눈에 보이면 손으로 가리키기라도 하겠는데 보이지는 않고. 결국 오늘도 앱에 있는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 주인 아저씨한테 보여준다. Harina(밀가루) 글자를 보니 아저씨가 웃으며 가져다 준다. 대도시 근처를 와도 영어가 안통하는건 똑같다. 아저씨하고 헤매고 있는 사이 민호와 소화누님에 어머니까지 슈퍼마켓에 들어오신다. 여태까지 본 장도 만만치 않은데, 어머니와 소화누님이 가세하니 짐이 점점 많아진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을려나...

 

 오늘 저녁은 해물수제비와 닭수제비다. 닭을 못먹는 나 때문에 두 개로 나뉘었다. 그리고 파전까지. 그런데 주방기기가 시원치 않다. 뒤집개는 고사하고 반죽할만한 큰 그릇도 없다 전기렌즈도 센서 때문에 제대로 물이 끓지 않고, 장보기 전에 제대로 확인 안한 것이 화근이다. 그래도 먹겠다는 일념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쟁반에다가 반죽을 하다보니 반죽이 너무 질게 돼서 전이라기보다는 튀김처럼 두껍게 되버린다. 뒤집개 없이 뒤집을려니 당연히 다 흩트려지고... 결국 또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가 해야지”


어머니가 한마디로 나에게 넘긴다. 먹기 위해서라도 해야지. 기름 잔뜩 두르고 한 개씩 뒤집어 파전을 만든다. 알베르게에 있는 외국인들도 뭐하나 싶어 구경하고. 완전 망가진 후라이팬으로 제대로 반죽도 안된 것을 가지고 파전을 계속 만들어내니 보아가 한마디 한다.


“오빠, 짱이다”


이런 걸로 짱이고 싶지는 않은데. 얼마나 집에서 혹사당했으면 이정도 실력이 나오겠는지 생각하면 내가 좀 안쓰럽지 않니? 뭐 그래도 다들 맛있게 배불리 먹으니 좋은게 좋은거다. 우리가 너무 맛있게 먹었나, 한 외국인이 맛이 궁금했는지 하나 줄수 있는지 물어본다. 마지막 조각이라 진짜 두껍게 만들었는데, 솔직히 제대로 된 파전맛이 아닌데 맛있게 먹어준다. 외국인 입맛이 다른걸까 아니면 그냥 예의를 차린걸까.

 

 어머니의 해물 수제비 맛은 한국의 맛 그대로다. 양념도 없는데 이렇게 맛을 내시다니 놀랍다. 어제 참치찌개도 그렇고, 정말 어제, 오늘 제대로 포식한다. 오래 해외 여행을 하다보면 음식 때문에 한국이 너무나 그리워지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어머니 덕에 그런 향수병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세탁을 맡겼는데 알베르게 주인 아저씨가 세탁물이 많다며 2개로 나눠서 하겠다고 한다. 한번에도 가능한 양인데, 의사소통하기도 어렵고 그냥 그러라고 했는데 그 후 문가에서 발견한 공지문. 세탁 3유로, 건조 4유로. 헉...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면 총 14유로라는 말인데, 완전히 당했다. 저녁 만들어가며 아낀 돈을 한번에 털어가신다. 알아보지 않고 맡겨버린 내 자신을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냐만은 솔직히 열은 받는다.

 

 저녁 먹고 남은 포도주를 보아와 용만이하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아버님이 나오신다. 현정누나가 포도주의 여왕이라고 한 보아도 술을 잘 마시지만, 아버님과 용만이 주량은 밑 빠진 독이다. 포도주 한병이 순식간에 거덜난다. 중부지방 들어온 이래로 날이 쌀쌀해지다보니 자체발열이라는 명분하에 저녁때마다 포도주를 마시는게 습관이 되버렸다. 이러다 한국가서도 포도주 놓고 식사하는거 아닌지 걱정이 된다. 술도 다 마시고나니 할 일이 없어 다들 침낭속으로... 또 하루가 흘러간다. 내일은 드디어 레온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