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목요일
온따나스(Hontanas) ->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 28km
조금 추운 새벽 기운에 눈을 떠보니 6시 직전이다. 어제 용만이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어제 너무 먼 거리를 걸어 많이 피곤해서일까. 중간에 깨지도 않고 잘 잤다. 놀라운 건 아직 지영이도 안 일어났다는 것. 다들 피곤했구나. 부스럭거리기 뭐해 더 자 볼려고 하는데 6시 괘종시계 소리에 결국 지영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에구, 결국 일어나라는 신의 뜻인가. 일어나보니 보아도 벌써 일어나 있다. 움직이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제 산 바케트 빵에 치즈와 햄으로 점심거리를 만들고 디지털 카메라 충전도 시키는데 전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서 제대로 충천은 안된다. 협회 알베르게는 아침이 안돼 사설 알베르게에 딸려있는 bar가 문을 열기를 기다려 7시 반쯤 들어갔다. 2유로에 커피 와 빵1개를 아침식사로 준다. 파인애플과 앵두로 토밍된 케익을 골랐다. 간만에 사과나 바나나가 아닌 과일 맛을 본다. 구릉 아래 형성된 마을이어서일까 해가 늦게 뜬다. 날이 아직 차갑고 경치 감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 동이 튼 후에 출발하려다 보니 8시가 훌쩍 넘어서 일정을 시작한다.
온따나스 마을을 벗어나자 앞쪽에 다시 구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또 저길 넘어가야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왼쪽으로 우회해서는 평지길을 한참을 간다. 오늘은 왼발목이 아프지 않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잡혀 있는 물집은 여전하지만 걷는데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걷는 속도가 어느 정도 나오다 보니 다같이 어울려 걷게 된다. 그러니 시작되는 현정누나의 공격.
“니 사랑 얘기 좀 해봐라”
뭐야, 이누나. 다른 사람들 사랑이야기는 다 들었다나, 내 얘기를 해보라고 재촉이다. 내가 말을 안하자 아예 앞뒤로 둘러싼다. 고작 2명 지나갈수 있는 좁은 길을 세자매와 용만이가 둘러싸니 도망갈 길이 없다. 용만이 이녀석은 아군이야 적군이야. 그런다고 나불거릴만큼 헤푼놈 아니다. 묵비권을 행사하자 이제는 약을 올린다.
“너 설마 유부녀하고 불륜이라도 저질렀어? 너가 말을 안하니 우리가 별별 상상을 다한다.”
유부녀와 불륜. 참 생각하는 것 하고는. 나란 놈, 순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막 나갈수 있는 놈도 못된다. 사랑이라? 난 아직도 사랑이란 감정을 잘 모르겠다. 과연 내가 품었던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잊으러 왔는데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어 준다.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미치고 환장하겠다.
내가 계속 묵묵 무대답으로 일관해 시들해지기도 했지만 좁은 소로길이 끝나고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서 길이 넓어지자 더 이상 날 에워싸 압박할수 없게 되면서 얘기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용만이와 대화 아니 수다를 떨다보니 벌써 10km나 왔다. 평야 한가운데 솟은 구릉에 형성된 마을 까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독특한 마을 구조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역시나 bar다. 오늘도 아침부터 카냐 한잔을 하고 달려주신다. 가스트로헤리스 마을을 나오자 멀리 구릉이 보인다. 이번에도 우회해서 돌아가나 했더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고개를 넘게 해주신다. 고개를 다 올라가니 또다시 잠시 평탄한 구릉이 펼쳐지다가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어 넓은 평야를 걸어간다. 마을은 고사하고 도로조차 보이는 않는다. 오로지 순례자들을 위한 흙길만이 길게 뻗어있다.
용만이와 나란히 걸었더니 이녀석 묻지도 않았는데 별별 얘기를 다 해준다. 자기 첫사랑부터 시작하더니 현정누나 얘기에, 보아 사랑 얘기까지.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노르웨이까지 떠날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보아를 볼 때마다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묘한 이질감의 정체가 조금이나마 윤곽을 드러낸다.
용만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다음 마을인 이떼로 델 라 베가(Itero del la vega)까지 쉬지도 않고 잘도 질러왔다. 오늘은 발이 제대로 걷게 해준다. 아니 수다의 힘인가?
점심도 먹을겸 들어간 bar. 탭이 있는데 생맥주가 안나와서 결국 병맥주를 시켜 먹는다. 도대체 탭은 왜 달아둔거야. 용만이는 또 광분하면서 다음 마을까지 빨리 갈 태세다. 아침에 준비한 점심거리를 먹으며 있으니 일행들이 하나둘 도착한다. 심지어 정호씨까지. 정호씨는 그냥 이 마을에서 빨래나 하고 쉬겠다고 한다. 하긴 날이 좋으니 빨래는 빨리 마르겠다.
다들 얘기하는 동안 먼저 출발했다. 쉴만큼 쉬었으니 발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다음 목적지 보아디야 델 카미노까지는 약 8km 정도로, 정보로는 평지길이다. 어제의 그 감동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는데 길이 좀 이상하다. 2.6km 떨어진 곳에 있다던 마을은 산티아고 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어 쉴수도 없고, 구릉을 하나 넘어야 하고, 넘고 나니 길 옆으로 둔덕이 있어 제대로된 지평선 감상은 할 수가 없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법. 목적지까지 빨리 가자는 심정으로 그냥 달린다. 뒤를 돌아봐도 따라오는 일행은 보이지 않는다. 전 마을에서 멈춰 섰나. 용만이의 마사지가 그립지만, 혼자 있는 것도 괜찮으리라.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어차피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인것을...
구릉을 내려갈 때 마을이 보여서 아무 생각없이 계속 걸었는데 생각보다 멀다. 평지로 내려오니 길 옆 둔덕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 안된다. 거의 기진맥진 할 때쯤 마을이 나타난다. 산티아고 길은 참 신기하다. 인내의 한계, 체력의 한계를 느낄때쯤 어김없이 마을이 나온다. 거봐, 참고 오니까 이렇게 오잖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보아디야 델 카미노에 들어서니 마을 초입부터 알베르게가 있다. 어디서 묵을건지 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오는지도 불확실한 상태. 어디로 가야 하나? 우선 아침부터 얘기한 Albergue En el Camino를 찾아갔다. 건물이 옛날 한옥 비슷한 처마도 있고 고풍스러운데다 마당이 잘 꾸며져 있어 기대했는데 일행이 6명이라는 얘기에 옛날에 마굿간으로 썼을것 같은 방 2층을 내어준다. 일렬로 있는 6개의 침대. 마치 우리 일행을 위해 준비된 것 같다. 일행들이 오는지 확신도 못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6명 자리를 맡아버리고 있다, 내심 일행들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안오면 뭐 될대로 되라지.
짐을 풀고 있으려니 지영이와 보아가 들어온다. 발이 안 좋다더니 잘만 따라온다. 역시나 구라 자매들. 샤워도 하고 세탁물도 맡기고 용만이와 bar를 찾아 마을 구경을 나선다. 불행히도 이 마을에는 슈퍼라 부를만한 것도, 식당이라 할만한 것도 없다. 모두다 알베르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힘든 순례자들이여 괜히 걷지 말고 한곳에서 편히 쉬라 이건가. 한 개 발견한 bar는 이름이 Dori 다. bar Dori. 붙여 읽으니 빠돌이 처럼 들려 우습다. 분명 탭도 있고 씨에스타 시간을 넘어섰는데도 영업을 안한다. 마을을 돌아 알베르게로 돌아가려는데 일본인 아가씨 한명을 만났다. 이미 5시가 가까운 시간인데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유스케가 생각난다. 일본 사람들은 여기 오기 전에 다들 훈련이라도 받고 오나. 참 잘들 걷는다.
어쩔수 없이 알베르게에 돌아와 용만이가 맥주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잔을 보여주면 작은 일반 잔과 큰 것 그란데(grande) 어느것을 할거냐고 물어본다. 병맥주를 팔면서 잔 크기를 묻지는 않겠지. 당연히 생맥주인줄 알고 그란데를 외쳤다. 그랬더니 병맥주 2병을 따서 큰 잔에 따라 준다. 뭐냐 이것은?
"어떻게 이 큰 마을에 탭 있는 bar가 하나도 없어. 여기 뭐 좀비들의 마을이야“
용만이 녀석 생맥주를 마실수 없자 또다시 광분한다. 숙박료만 지불하지 않았으면 다음 마을까지 가고도 남을 놈이다.
저녁 먹기 전까지 자리 잡고 앉는다고 들어가서 커피도 그란데로 시켰더니 완전 큰 사발에 커피를 따라준다. 이건 그냥 많은 양의 커피가 아니라 커피 스프 수준이다. 커피 마시다 죽으라는 걸까. 무지하게 많이도 준다.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는다. 식탁이 전부 10인용 긴거다보니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게 된다. 스위스 아주머니와 독일인 아저씨, 아주머니가 우리자리에 동석한다. 저녁으로 나온 감자스프와 콩스프도 좋았고, 우리나라 장조림 생각이 나게 만드는 비프 요리도 나름대로 맛있다. 두두라는 이름의 웨이터가 서빙을 보는데, 한국어 몇단어를 말하더니 자기 이름을 식탁보에 한글로 쓴다. 말꼬랑지 같은 레게 머리가 잘 어울리는 유쾌한 청년이다. 알베르게에 처음 들어왔을때는 별로란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 처음의 느낌을 많이 달라지게 한다. 역시 사람은 누구나 웃는 얼굴이 가장 보기 좋다.
산 후안 데 오르떼가에서 배드벅에 많이 물리다 보니 사람들이 매트리스나 모포 상태에 많이 민감해져 있다. 여기 알베르게도 춥기 때문인지 모포가 있지만 다들 배드벅의 공포 때문에 한쪽으로 치워놓는다. 지금까지는 배드벅한테 안물리고 잘 버텨 왔는데, 허름한 마굿간 같은 곳이다 보니 배드벅 걱정이 된다. 과연 내일 아침에 내 몸이 무사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