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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고니* 2013. 3. 11. 12:46

 

10월 13일 수요일

부르고스(Burgos) -> 온따나스(Hontanas) 31km

 역시나 오늘도 갈증 때문에 12시 조금 넘어 잠이 깼다. 어제 산 후안 데 오르떼가는 모포까지 덮고도 추웠는데, 여기 부르고스는 침낭만으로 충분하다. 산위와 아래의 차이가 큰 걸까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난방이 되기 때문일까. 다행히 코골이를 심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오늘도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잠을 자다 깨다 하다가 결국 지영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여하간 5시면 알아서 일어나는 지영이도 참 대단하다. 침대 매트리스가 안좋아 잠을 못 잤다는데, 그런면에서는 나보다 참 민감 아니 예민하다고 해야 하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짐 정리를 하고 나니 잔돈이 한가득이다. 그것도 50센트만. 어제 계산하면서 모인 잔돈들. 동전도 모이면 무게가 상당해 짐처럼 여겨진다. 새벽이라 추워 몸도 데울겸 자판기에서 핫초쿄 한잔을 뺐다. 자판기 커피맛은 별로더니, 핫초쿄는 자판기나 bar에서 파는거나 거기서 거기다.

 

 알베르게 문은 6시 반부터 열리지만 밖은 너무 어둡고 도시 표지가 영 이상해서 아무래도 길을 잃을 것 같다. 동 트기를 기다리다보니 7시 반쯤 출발한다. 어제 저녁때만 해도 부르고스에서 쉬니 어쩌니, 버스 타니 안타니 하더니만 보아와 현정누나는 컨디션이 괜찮다고, 어머니와 소화누님은 갈 때까지 가보다가 택시 타겠다고 전부 길을 나선다.

 

 내가 일행들에게 계속해서 한 말이 있다.


“전 중부지방 들어가면 천천히 걸을 거에요”


 애초에 중부 지방을 걷기 위해 산티아고 길을 왔기에 거기서만큼은 천천히 걸을 생각이었다. 그 중부지방이 부르고스에서부터 시작이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멈출지 나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제는 날 기다리지 말라고 일행들에게 말했다.

 

 길을 나선 초반에는 언제나 내가 꼴찌다. 얼어붙은 발이 고통에 익숙해지고 발이 풀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구시가를 벗어나는데 일행들이 돌아온다. 설마, 길을 잘 못 들었나? 의아해하는데 bar를 보고 들어간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순례자들이 아침에 문 연 bar를 지나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bar에서 커피한잔에 빵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bar 옆의 빵집에서 바케트도 하나 사서 점심거리를 준비한다. 일부러 큰 돈을 바꾸려고 20유로를 냈는데 큰 바게트 빵이 단돈 80센트다. 최소한 몇 유로 할줄 알았는데, 아저씨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길도 역시나 표지가 안좋다.


“Con su permiso. Donde esta camino de santiago?"

(실례합니다. 산타아고 가는 길이 어디 있나요?)


내가 가장 많이 한 스페인어가 이 말이다. 뭐 제대로 된 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물으면 다들 길을 알려준다. 문제는 내가 스페인어를 하는 줄 알고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설명해서 곤욕스러울 때도 많다는 것. 어차피 손으로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에 대충 웃어주면 대부분 해결된다. 오늘도 길을 찾아 여러 행인을 붙잡고 묻는다. 길을 찾기 전까지는 나를 따라오던 일행들이 길을 찾고 나니 앞서서 걸어간다. 내가 워낙에 천천히 걷다보니 일행들과의 거리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다.

 

 부르고스 신시가지를 지나 벌판을 가로지는 길을 걷는다. 부르고스의 알베르게를 나와 첫 번째 마을 따르다호스(Tardajos)까지는 무려 10km가 넘는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평지길이라는 점. 부르고스를 나올때 멀리 언덕이 보여 저기를 넘어가나보나 짐작했는데, 길은 언덕을 향해가다가 우회해서 왼쪽으로 돌아간다. 따르다호스 마을에 들어서니 bar 앞에서 현정 누나가 손을 흔든다.


“어머, 세상에 내가 bar에 앉아 너에게 손을 흔드는 날이 올 줄이야. 기념이다 내가 맥주 한잔 산다.”


 나보다 일찍 도착해서 반겨줄 수 있다는 것 하나로 현정누나는 신이 났다. 뭐 공짜 맥주를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누나가 사준 맥주는 레몬맛이 섞여 있어 희한한데 나름대로 독특하고 맛있다. 스페인은 bar마다 맥주맛이 조금씩 달라 길을 걸으며 그 맛을 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두 번째 마을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e de las Calzadas)를 지나면서 아침부터 흐려있던 하늘이 조금씩 벗겨진다. 길도 평지길에서 조금씩 오르막으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평탄한 구릉지대를 가로지른다. 보이는 거라고는 길과 들녘, 그리고 앞서 걸어가는 순례자들뿐. 앉아서 쉴 벤치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아무생각 없이 그냥 하염없이 걷는다. 중간에 쉬지를 못하고 걷다보니 머릿속에는 언제 마을이 나타나나, 제발 빨리 좀 나와라는 갈망뿐이다.

 

 구릉이 끝나면서 멀리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가 보인다. 부르고스에서 20km 떨어진 마을인데 얼마나 쉬지 않고 걸었으면 2시도 되기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일행들이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있다. 가게에서 산티아고 길이 469km 남았다는 스탬프를 찍어준다. 스탬프를 찍으러 들어간 김에 아침에 산 바케트랑 먹기 위해 햄과 치즈를 고른다.

 

 시간이 이제 2시밖에 안되다보니 더 갈지 여기서 머물지 결정을 해야 한다. 다음 마을인 온따나스까지는 11km, 중간쯤 산볼(San Bol)에 알베르게가 있지만 수용인원이 9명이라 자리가 있을것 같지도 않고 그 외에는 쉴 곳이 없다. 지영이, 보아, 현정누나는 더 가겠다고 앞장서 걸어가고, 어제부터 컨디션이 안좋았던 용만이는 쉬고서 생각하겠다고 bar를 찾아간다. 어머니와 소화누님, 민호는 더는 못가겠다고 알베르게로 들어가고, 나는 어쩌지. 다리도 다리지만 중간에 쉬지 못하고 계속 걸었더니 배낭 무게 때문에 어깨가 완전히 뭉쳤다. 용만이가 마사지를 안해주면 내일 당장 더 힘들어질테니 용만이를 따라서 움직여야 하나 고민이 된다.

 

 용만이를 찾아 bar로 가는데 용만이가 bar에서 나오더니 온따나스까지 가겠다고 한다.


“형, 여기 탭이 없어. 카냐(생맥주)를 시켰더니 병맥주를 잔에 따라주는거 있죠”


생맥주를 마실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힘들다던 놈이 11km 더 가겠다고 앞장서 간다. 난 마사지를 받기 위해 따라붙고, 아버님은 아들이 가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오신다.


“구라 세자매는?”


 팜플로냐였는지 로그로뇨였는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지영이와 보아, 현정누나에게 구라 세자매라는 별명을 붙였다. 맨날 컨디션 안좋다면서 선두로 걷는 지영이. 발톱 빠져서 걷기 힘들다면서 지영이에 뒤지지 않고 걸어가는 보아. 허구한날 ‘날 버리지마, 누나는 더 이상 못가겠다’ 하면서 주구장창 잘만 걷는 현정누나를 보면서 생각이 든건 ‘오늘도 구라네’였다. 내가 구라 세자매라고 부르니까 지영이 한다는 소리가 내기만 하면 한번도 안져서 자기 별명이 구라지영이라나. 내가 구라 세자매, 구라 세자매 하다보니 일행들도 이제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bar에 들어가서 커피 시키던데요”


앞서간 세자매가 안보여 물었더니, 용만이 말로는 bar에 앉아서 쉬고 있단다. 뭐야, 그럼 안오겠다는 거잖아. 이렇게 헤어지면 10km 이상 거리가 차이난다. 다시 만날 수 없겠구나 싶어지니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느낌이 이상하다.

 

 결국 아버님과 용만이 나만 마을을 벗어나 산볼로 올라가는 길을 걷는다. 산볼로 갈라지는 갈림길 표지가 나타날 때 멀리서 수다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 한국어 같은데... 이상해서 돌아보니 저 멀리서 세자매가 올라오느게 보인다. 무슨 여자들이 이리도 잘 걷는지 금방 따라붙더니 지나쳐 사라진다. 안오는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다.

 

 언덕길을 다 오르니 갑자기 지평선이 펼쳐진다. 언덕 위에 펼쳐진 구릉. 너무나 환상적이다.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까지 오는 구릉지대는 군데 군데 산도 보이고 약간의 경사가 있어 깨끗한 지평선이 아니었는데, 온따나스로 가는 길은 지평선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다. 가도 가도 모든 방향이 지평선만 보이고 하늘 위에는 구름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내가 산티아고 길을 오면서 기대한 바로 그 장면이다. 만약 안오고 오르니요스에서 머물렀다면 내일 아침 어둠에 둘러쌓인 길을 봤을테니 정말 아쉬울뻔 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걸었기에 힘은 거의 빠지고 시간은 가장 뜨거운 2시경이다.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길게 뻗어 있는 길과 지평선 그리고 파란 하늘만이 보이는 전부다. 거리가 벌어져 순례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이 길 뿐이니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 어찌보면 인생에서 내가 지나고 있는 시점이 이 길이 아닐까 싶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끝날거라는 믿음 하나에 의지해 한없이 가야만 하는 길.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면서도 정작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해 낙담하고 좌절하고 방황했던 내 인생. 이 힘든 시기 또한 언젠가는 끝날거라고, 결국 지나가리라 되내이며 가슴에 새겨넣는다. 언젠가 나의 길을 찾게 될거라고.

 

 경치에 취해,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걷다보니 걸음은 점점 더 더디어진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길. 그래 이 길을 위해 여기에 온거야. 사색에 잠겨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가슴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풀어 헤쳐지는 느낌이랄까 간만에 행복하다는 감정이 배어나온다.

 

 한참을 가다보니 지평선이 끝나며 갑자기 푹 꺼진 지형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알베르게 건물 하나.  마을인줄 알았는데 덜렁 알베르게 건물만 있다니, 더구나 산티아고 길에서 한참을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다. 저 멀리 돌아가면 마을이 있을려나. 확신을 할수 없는데 저기까지 돌아갔다 오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생맥주 한잔을 하며 마음에 들면 하루 밤 묵어갈려고 했던 산볼이 이런 곳이라니.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온다. 이제는 온따나스까지 죽어라 갈 수밖에 없다.

 

 산볼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니 다시 구릉위로 지평선이 펼쳐진다. 저 멀리 어디선가 또다시 구릉이 꺼지며 마을이 나타나겠지.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처음에는 너무나 행복했는데, 산볼을 보고 난 후에는 끝까지 갈수밖에 없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때문일까 피로감, 허무감... 뭔지 모를 느낌과 함께 몸이 지쳐온다. 다행히 오랜 시간 걷다보니 통증에 무감각해져서 어느 정도 속도를 내서 걸을 수 있다. 어차피 구름도 걷혀 하늘은 푸른색 일색이라 마땅히 새로운 볼거리는 없다. 지깟것이 길어봐야 4km 정도겠지. 어차피 끝은 있다. 이 심정으로 죽어라 땅만 보고 걷는다.

 

 가도 가도 지평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이러다 쓰러지는것 아닌가 두려워질때쯤 구릉이 갑자기 꺼지면서 구릉 바로 밑에 온따나스 마을이 드러난다. 내리막 길이기도 하지만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발이 풀려버린다.

 

 마을에 들어섰는데 일행들이 안보인다. 내가 한참 후에야 올 줄 알고 밖에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막판에 너무 속도를 냈다. 아마도 협회 알베르게로 갔으리라. 찾아가보니 예상대로다. 내가 들어서자 자기들도 온지 10여분밖에 안됐다며 다들 놀란다.


“안 올줄 알았는데, 너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게 지영이야, 보아야?”


 현정누나가 또다시 짓궂게 나를 놀린다.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에서 여자 셋만 여기 온다고 할때 오지 않으려다 용만이가 오는 바람에 따라온건데, 이런 말이 나올줄 예상했었다. 누님들 생각이야 뻔하지.


“용만이 마사지가 필요해서 왔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용만이 마사지 때문이었을까, 누구랑 헤어지기 싫어서였을까. 그러면서도 걷다보면 생각나는 옛사람. 문득 문득 피어나는 그리움은 나도 어쩔 수 없다. 버릴려고 왔건만 버려지지 않는 것은 그냥 마음 한구석에 고이 묻어야 하는 걸까.

 

 알베르게 2층을 배정받았는데 샤워실이 2개 있다. 우연찮게 현정누나가 샤워하고 있는데, 옆 부스에 들어가 샤워를 하게 됐다.


“어머, 우리가 이제 샤워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된거니”


내가 미쳐. 놀리는 수위가 점점 세진다. 요즘 현정누나가 날 놀리는 재미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게 아닌가 가끔 의심이 든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간 곳에서 정호씨를 만났다. 참 이 사람하고도 질긴 인연이다. 헤어졌다 싶으면 다시 보고 또 보고. 오늘도 주문을 하다보니 또 Lomo, 돼지고기 요리를 시킨다. 첫 번째 요리로 나온 파스타는 완전 토마토 케찹맛이고, 로모도 별로다. 리오에서 먹던 맛이 그리워진다. 그나마 맥주 탭이 있는것이 다행이다.

 

 숙소로 돌아와 용만이에게 마사지를 받는다. 받을때 이 악물고 참았던 고통이 끝난 후에는 아주 개운하다. 인생의 고통도 이러면 좋으련만. 어째서 주구장창 고통만 이어지는 걸까. 언젠가는 기쁨이 있을거라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 날이 언제 올것인지 너무 늦게 오는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 과연 오기는 할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인생은 알면 알수록 너무나 어려운 것 같다.

 

 지평선을 보며 걸을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간단한 그 명제를,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새겨가며 걸었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고 한번뿐인 인생이다보니 밀려드는 두려움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내일부터 몇일간 계속 보게 될 지평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얻어가게 될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크지 않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