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화요일
산 후안 데 오르떼가(San Juan de Ortega) -> 부르고스(Burgos) 27km
목이 말라 잠을 깨보니 12시 반밖에 안됐다. 역시 어제 너무 많은 포도주를 마셨다. 아예 수통을 옆에 끼고 잠을 청하지만, 갈증과 추위 때문에 1시간 간격으로 깨기를 반복한다. 산 아래 있는 마을답게 새벽이 되자 무지 추워진다. 침낭에 모포까지 덮었는데도 슬금슬금 스며드는 추위가 느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5시까지 버티다 일어났는데 보아가 먼저 일어나 있다. 언제나 지영이가 제일 먼저 일어났는데 오늘은 늦잠을 자나...
빨래는 역시나 하나도 안말라 있다. 날이 맑기라도 하면 배낭에 매달고 갈텐데 아직도 잔뜩 흐려있는지 별이 하나도 안보인다. 다행이 신문지를 꾸겨 넣어둔 신발 안쪽만은 제대로 말라 있다. 빨래를 전부 비닐봉지에 싸서 배낭에 넣고, 짐을 꾸리고 있으니 지영이가 짐을 챙겨 나온다. 그럼 그렇지, 늦잠 잘 지영이가 아니지...
6시도 안된 시간. 달빛은 고사하고 별빛조차 없이 어둡고 날은 너무 차갑다. 그리고 진눈깨비 같은 것까지 흩날린다. 이런 날 일찍 떠나는 것은 아무래도 안 좋을 것 같아 날이 밝으면 떠나라하고 혼자서 먼저 길을 나선다. 여기서부터 부르고스까지는 27km를 걸어야 한다. 어제 아게스까지 갔더라면 무리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 내 다리상태를 생각하면 8시간 이상이 걸릴거다. 부르고스도 대도시답게 순례자들이 다들 쉬어가는 곳이니, 오후 늦게 도착해서는 알베르게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다. 부르고스를 앞에 두고 어쩡쩡한 곳에서 하루 쉬어갈수도 없고, 어쩔수 없이 무리를 해서 일찍 떠난다.
어두운 산길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홀로 걸어가니 산짐승이나 귀신이 나올것 같아 으스스하다. 옛날에는 이 길이 산적들이 출몰하던 곳이라더니, 어둠속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에 발이 아프다는걸 망각하고 빨리 걷게 된다. 산길을 통해 아게스까지 간 후에는 다음 마을인 아따푸에르까(Atapuerca) 까지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뒤를 돌아보니 어제 넘어온 산 너머로 여명이 밝아올 채비를 하고 있다.
아따푸에르까에 도착해보니 8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라 문을 연 바가 없다. 쉬어갈 곳이 마땅히 없어 그냥 눈에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는데 밖에 의자는 다 젖어 있고, 결국 수통만 채우고는 바로 떠난다. 아따푸에르까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안개인가 잔뜩 낀 돌길을 한참을 올라간 후에 완만한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왼쪽으로는 군사지역이라고 길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는데, 군 시설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때쯤이면 9시는 넘을거고 그러면 bar가 문을 열었겠지. 차 한잔하며 몸좀 녹이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도무지 마을이 보이질 않는다. 거의 세시간째 계속 걷다보니 힘든건 둘째치고 화장실이 급하다. 왠만하면 안할려고 했는데 마을은 언제 나올지 모르고, 다행이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어 가볍게 노상방뇨. 이럴때는 남자라서 편하다.
언덕을 내려와 평지길에 접어들때쯤 뒤에서 정호씨가 나타난다. 어제 아게스까지 간다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따푸에르까에서 묵고 8시 넘어 출발했다고 한다. 그럼 아까 내가 들어갔던 알베르게에 있었다는 말인데, 거기서 못보고 길에서는 만나니 참 희한한 인연이다. 정호씨 하고는 계속 그랬다. 나는 협회 알베르게를 주로 들어갔고, 정호씨는 사설 알베르게를 많이 이용하다보니 마을안에서는 거의 못본다. 그런데 정호씨가 걸을때는 언제나 빠르게 걸어가고 쉬어갈때는 한참을 쉬다보니, 길에서는 하루에 두세번씩 마주친다. 이번에도 정호씨는 빠르게 앞질러서 사라진다. 하여간 걷기는 무지 잘 걷는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다음 마을인 까르데뉴엘라 리오 피코(Cardeňuela Rio Pico)가 나타난다. 마을 바에 들어가니 한참을 앞질러 간줄 알았던 정호씨가 있다.
“여기는 커피밖에 안돼요”
정호씨가 커피잔을 들어보이며 알려준다. 아침도 못먹고 계속 걸어왔는데 그 흔해빠진 빵 한덩어리 없다니, 뭐 이런 bar가 다 있어. 배가 고프지만 어쩔수 없다. 커피 한잔이나마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새벽 바람에 언 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부르고스가 가까워져서 일까, 마을 간격이 짧다. 다음 마을인 오르바네하 리오 피코(Orbaneja Rio Pico)까지 30분 정도밖에 안걸린것 같다. bar가 보여 들어가보니 여기는 빵이 있다. 이렇게 빨리 쉰 적이 없지만, 지금은 배를 채우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커피를 먹기 그래서 아침부터 카냐를 시켜놓고 빵으로 요기를 한다. 혼자 bar에서 쉬어가는게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언제나 일행 한두명은 꼭 같이 있었는데, 아까도 정호씨가 있었고, 이번처럼 완전히 혼자서 쉬어간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얘기할 상대가 없다보니 그저 묵묵히 먹기만 한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네. 일행들과 너무 오랫동안 같이 다닌 걸까, 혼자라는 그 느낌이 외롭다는 그 감정이 더 크게 다가온다.
오르바네하 리오 피코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공항 주변 도로를 돌아서 철로 위 고가를 지나면서부터는 편도3차로의 큰 대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게 된다. 대로에 들어설때 부르고스까지 10km 표시를 봤는데, 부르고스까지 그냥 직선으로 곧게도 뻗어 주신다. 보이는 거라고는 도로와 건물뿐이다. 산길, 들길만 걷다 도로변 인도를 걷자니 왠지 모르게 낯설다.
한참을 걸어 부르고스 입구에 도착. 다 왔다 좋아했더니 도시 초입부터 알베르게 도착할때까지만 1시간 반을 걸었다. 아무 생각없이 대로를 따라 걷다가 산티아고 길 표시를 잃고 길을 헤매고, 도시 사람들은 인사도 잘 안 받아주고, 부르고스 첫 인상이 별로다. 도시에 살면 사람들이 삭막해지는 걸까? 사람들의 얼굴이 대부분 무표정해 시골의 정겨움과 너무나 대조된다. 어제 산 후안 데 오르떼가의 웨이터는 아주 유쾌하고 활기찼는데, 다들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되는 엉터리 스페인어로 물어 물어 Albergue Municipal de Burgos를 찾아갔다. 협회 알베르게중에서도 숙박료가 가장 싼 3유로. 하지만 시설은 최고다. 이미 많은 순례자가 줄을 서 있다. 일행들이 나중에 왔을때 자리가 없을까봐 미리 자리를 맡아놓는다.
“Me grupo es nueve"
말도 안되는 스페인어를 지껄였는데, 9명이라는 건 알아들었는지 뭐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내가 스페인어를 어떻게 알아듣나. 다행히도 옆에 있던 다른 자원봉사자가 영어가 된다. 9명 모두 한국인이라고 하니 데스크에 있는 자원봉사자들 황당해 한다. 9명이나 되는 무리라니... 아예 맨 꼭대기 5층에 자리를 배정해준다. 이렇게 힘들여 자리 맡아놨는데 일행들이 다른곳으로 가면 난 어떻게 되는거지? 이제는 다른 걱정이 든다. 어떻게든 혼자가 되보겠다고 하는 놈이 일행들 자리까지 맡아놓고 기다리면서 안오면 어쩌나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내 자신이 우습다.
샤워를 하고 났더니 나가기가 너무 귀찮다. 오늘 먹은거라고는 아침에 먹은 빵 한 개 뿐, 점심도 걸렸는데 배가 고픈것보다 그냥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솔직히 혼자서 식사하기도 싫고... 그냥 침낭 안에 들어가 씨에스타 시간을 빈둥거리고 있으니 3시가 넘어 언제나 선두로 걷는 지영이가 첫 번째로 도착한다. 잠시 후에 아버님이 오시고 일행들이 속속 도착한다. 부르고스 도시 내에 산티아고 길 표지가 잘 안되어 있어 다들 조금씩 길을 헤매다가 오느라 늦었다고 한다. 똑부러지는 지영이까지 잠시 헤맸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이틀 동안 날이 짓궂어 제대로 빨래가 마르지 않다보니 다들 세탁기에 모여든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각각 2대인데, 세탁기 1대가 고장이다보니 세탁기 줄이 늘어선다. 줄을 기다려 세탁을 하는 동안 용만이는 대학으로 스탬프를 받으러 간다. 어제 힘들다고 하더니만 올때 갈지자로 걸었다나. 오자마자 뻗어버리더니 택시타고 간다고 나간다. 그런데 기운 없이 나간 녀석이 돌아와서는 자랑이 늘어선다.
“형, 형 여기 택시가 뭔지 알아요? 아우디 A4에요. 세상에 아우디 A4가 택시라고요”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쉴새없이 자랑하는데, 아까 쓰러지기 직전의 용만이 맞나 싶다. 그런데, 가만 이녀석 왜 이렇게 흥분하는거야? 아우디를 택시로 쓰는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인가... 뭐 그래도 아까 맥빠진 모습보다는 이렇게 흥분해서 떠들어 대는게 더 용만이다워 보기는 좋다.
“난 이 발로는 더 이상 못 걷겠다. 부르고스에서 하루 쉬고 갈거야. 보아도 컨디션이 안좋고”
스페인 오기전에 발톱을 하나 뺐다고 하는 현정누나 발은 상태가 장난이 아니다. 보아도 양쪽 엄지발톱이 다 빠져있고... 알베르게에서 쉴때마다 발가락에 테이핑하는거 보면 어떻게 저런 발로 걷나 싶었는데 결국 쉬어가겠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일정이 촉박해서 안되겠어. 내일은 버스타고 레온까지 갈 생각이야. 혹시 알아, 우리가 천천히 걷다 보면 산티아고 도착하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될지”
일행중 가장 느리게 걷는 소화누님은 계획된 일정상 계속 걸어서는 제때에 산티아고까지 못가겠다는 판단이 섰는지, 어머니하고 둘이서 버스를 타고 앞질러 가겠다고 한다. 다들 발 상태나 걷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부르고스에서 쉬는 사람, 버스타고 질러가는 사람, 쭉 걸어가는 사람. 계획이 다들 틀려진다. 진짜 헤어질 시간이 오는 것 같다. 이러고 내일 또 알베르게에서 뭉쳐버리면 진짜 코메디인데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다들 빨래를 돌리고 최후의 만찬을 하러 나간다. 내일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다들 부르고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도 여러장 찍는다. 광장 쪽으로 나가며 식당을 찾는데 식당은 안보이고 bar만 보인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식당을 찾아 헤매다보니 걷는데 지쳐있는 지영이가 흩어져서 먹자고 제안을 한다.
“어쩌면 최후의 만찬일지 모르는데 그러지 말고 마지막으로 저쪽 골목만 가봐요. 저쪽 느낌이 좋아요”
용만이가 마지막으로 한곳만 더 찾아보자며 일행들을 이끈다. 골목에 들어가보니 bar만 가득하다. 그럼 그렇지. 용만이가 찾는데 당연히 맥주가 나오겠지. 지영이가 쪼개지자고 말하려고 할 때 기가 막히게 눈에 들어오는 menu del dia. 그런데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에만 돼서 저녁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러나, 가판에 세워진 여러 가지 음식 사진들이 여성들의 눈을 잡아끌어 결국 다같이 bar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본다. 문제는 좌우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느냐. 두 곳 다 음식이 괜찮아 보여 갈등이 된다. 안보일때는 하나도 눈에 안 띄다가 나타날때는 꼭 갈등을 하게 여러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
한곳을 골라 들어갔더니 이제는 어느 요리를 시키느냐로 지영이와 보아, 현정누나의 수다가 시작된다. 메뉴 선택에 관여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결국은 자기들 좋아하는걸로 시킬건 뻔하다. 전적으로 위임하고나니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진열된 타파스가 눈에 들어온다. 용만이는 건너편 bar에 갔다오더니 두 가게 타파스가 완전히 다르다고 흥분한다. 결국 타파스 맛을 보기 위해 여기서는 식전에 카냐 한잔을, 건너편 가게에서는 식후에 한잔을... 이러니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아니라 카미노 데 카냐라는 말이 나오지.
힘들게 찾아다닌 보람이 있었는지, 식사는 전부 맛있었다. 맥주도 나름 독특했고, 타파스도 괜찮았다. 특히 버섯으로 만든 타파스 맛이 일품이었다. 스페인 바의 타파스는 정말 복불복이다. 잘 고르면 환상, 잘못 고르면 환장. 산티아고 길 시작하고 매일 같이 음주다. 쉴때마다 마셔되는 생맥주에, 저녁 식사에는 항상 포도주가 있고. 이러다가 산티아고 길 끝나고 나서 알콜중독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